작가 김정헌(76)의 작업실을 지난 주말 찾았다. 소박했다. 살림집 앞에 작은 작업실이 딸린 구조인데, 작정하고 지은 여느 화가들의 천장 높은 작업실과 달랐다. 공주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지내던 그가 여기 작업실을 구한 건 1999년. 아내와 두 딸은 서울, 가르치는 대학은 충남 공주, 작업실은 가평에 있으니 주변에선 황당해 했다. 외환위기로 빚잔치에 몰린 버섯재배 농부의 집을 샀다고 했다. “사업은 망했지, 아내는 떠났지. 가련해 보이더라고.”
계산기를 두드리기보다 손해 볼 줄 아는 성정이 느껴졌다. 민중미술계의 어른으로 대접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업실 규모가 좀 작다”고 했더니 “내 그림도 꾀죄죄한데 뭘, 방석 깔고 앉아 그리는 그림도 많고”라며 눙쳤다. 벽에 천사 날개를 달고 웃는 악동으로 표현된 자화상, 달력 포장지에 그린 농촌 풍경 등 작은 그림들이 걸려 있긴 했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9m 길이 유화도 작업 중에 있으니 스케일이 작은 화가라고만 볼 수 없다. 작업실이 작다 보니 물감이 마르면 둘둘 말아가며 그릴 뿐이었다. 300호정도 대작은 벽면에 캔버스를 세워두고 그린다고 했다.
화가라면 유아독존형이 적지 않은데, 원로화가 김정헌의 화법에는 이렇듯 겸손과 해학이 있다. 연초에 낸 회고록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창비)에도 그런 태도가 깔려 있다. ‘나 같은 화가 나부랭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식이다.
창비가 회고록을 낸 건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에 이어 김정헌이 세 번째다. 회고록의 부제는 ‘민중미술과 함께한 40년’이다. 1979년 최초의 민중미술 단체인 ‘현실과 발언’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80년대 군부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며 예술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변혁의 목소리를 낸 그의 삶을 그렇게 요약한 것이다. 사회 참여 미술을 해온 과정에서 번번이 ‘감투’를 썼다. 민족미술협의회 대표, 전국민족미술연합 공동의장, 문화개혁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최근에는 4·16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책에는 60년대 얄개전처럼 재미있게 서술된 개인사와 함께 80년대 이후 한국 미술의 한 축인 민중미술의 전개 과정과 그 흐름을 이끈 사람들, 그들이 만든 사건으로서 일화가 등장한다. 대통령부터 미술사 연구자나 아는 보통 사람까지 많은 이름이 나온다. 누가 누가 등장하나 살펴보며 읽는 재미가 있다. 출간의 단초를 제공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너무 많이 등장시킨 것 아니냐는 우스개소리도 주변에서 나왔다.
2년 전 ‘현실과 발언 40년’ 전이 서울 학고재갤러리에서 개최됐다. 이 전시에 참여하며 민중미술 40년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저술 제안이 들어왔다고 했다. 현실과발언 창립전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80년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렸다. 컴컴한 어둠 속에 촛불을 켠 채였다. 미술관에 실려 온 그림들을 본 당시 관장이 깜짝 놀라서 직원을 시켜 전등을 끄게 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얌전한 작가를 빼놓곤 대부분의 작품이 험했어. 특히 임옥상의 작품은 전두환 정권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작품들이었어요. 당시가 계엄령 치하였는데도 말이지요.”
그때까지는 이런 미술 운동도 ‘비판적 현실주의’ 등으로 소개됐다. 이원홍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공식 석상에서 “소위 민중이라는 불온한 활동을 하는 움직임이 미술계에도 퍼지기 시작했다”고 비판한 뒤부터 민중미술이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서양미술사에서 인상주의 야수주의 같은 용어가 비평가들의 조롱에서 비롯된 것처럼 민중미술도 비슷한 경로를 지나온 것이다.
자신을 얌전한 작가라고 부르는 건 농촌 그림을 주로 그려왔다는 이유에서다. ‘시뻘건 그림’을 그리는 임옥상, 신경호, 노원희 등과 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정헌의 농촌 그림은 밀레의 ‘만종’과 같은 목가적 풍경이 아니다. 예컨대 중산층 거실에 럭키모노륨 장판이 깔려 있고 그들의 풍요를 뒷받침하듯 장판 아래 모 심는 아낙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정헌 하면 떠올리게 되는 대표작 ‘럭키모노륨-풍요로운 생활을’(1981) 등에서 보듯 정권의 이농 정책으로 무너지는 농촌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한다.
평양 태생인 그는 분단과 함께 가족이 월남한 이후 서울과 부산에서 성장했다. 서울대 미대와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가 어떻게 농촌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을까.
그는 “80년(34세)에 공주사대(현 공주대) 미술교육과 교수가 됐다. 매주 월∼목 수업을 하고 나면 주말에는 학생들과 남도로 답사를 다녔다. 이촌향도의 시대였다. 마을마다 빈집이 많아서 자연스레 농촌 현실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마을을 지키는 김씨’(1987)에는 삽을 움켜쥔 채 소나무처럼 땅에 뿌리를 박은 농부가 그려져 있다. ‘하늘에 계신 곡괭이님’(1993)은 땅에 낫과 호미, 수저 등이 씨앗처럼 심겨 있고 하늘에 달처럼 곡괭이가 떠 있다. 대대로 농촌에 살았던 사람처럼 농부의 마음을 그린다.
생태철학이 뒷받침되며 농촌미술은 생태미술로 주제가 확장됐다. 그는 책에서 대학 동창이자 ‘녹색평론’ 발행인인 문학평론가 김종철에 빚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서울대 영문과에 다닐 때부터 칼날 같은 말과 글로 ‘날카’라는 별명이 붙은 김종철은 유달리 농촌 문제에 대한 사유가 깊었다.
“나의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높고 큰 나무이거나 그늘을 만들어주는 거대한 숲이었다. 나는 김종철과 ‘녹색평론’의 그늘에서 생명사상을 포함한 민중적 사고를 키울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친구이면서 스승이었던 셈이다.”(218쪽)
2019년 김종영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에는 ‘기계식 농법에 반대하는 낫, 호미, 곡괭이’라는 글귀가 적힌 그림(2019), 폐기된 중공업 공장에 녹색 풀이 돋는 ‘갈등을 넘어 녹색으로’(2019) 등의 신작을 내놨다. 생태철학이 반영된 그림들이다.
미술계 좌장인 그는 총감독처럼 여러 행사를 조직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로 문민정부의 등장과 함께 1994년 개최될 수 있었던 ‘동학농민 100주년 기념전'을 꼽았다. 민중미술 진영뿐 아니라 보수적인 모더니즘 진영까지 아울러 작가 16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전시였다. 공주사대에 재직할 때부터 공주시민들과 함께 우금치를 비롯해 동학혁명 유적지를 답사하고 관련 그림을 그려왔기에 더 신명 났다.
마침 지금 손대고 있는 작업도 동학농민전쟁이 주제다. 역사적 사건의 주요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는 서사화로 마지막 1m에 담을 장면은 아직 비어 있다. “농민군이 한양 진격의 마지막 관문인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관군과 장렬하게 싸우는 클라이맥스 장면을 넣을 생각이다. 어떻게 상징화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며 아직 끊지 못한 담배를 꺼냈다. 공주시립미술관에 기증할 이 작품이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했다.
가평=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