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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부커상 후보… 이상하고 아름다운 ‘보라 월드’

정보라 작가가 지난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부커상 후보에 오른 자신의 소설집 ‘저주토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정보라는 이날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혜화역에서 열린 장애인 집회에 참석하고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권현구 기자




영국 부커상이 지난달 2022년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자 1차 후보(롱 리스트)로 한국인 작가 두 명을 호명했다. 박상영(34)과 정보라(46). 2016년 한국 작가 최초로 이 상을 받은 한강이나 2019년 후보에 올랐던 황석영에 비하면 두 사람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특히 정보라는 무명에 가깝다. 공식적인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누구나 알만한 문학상을 받은 적도 없다.

정보라는 환상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웹진이나 잡지에 글을 써왔다. 그의 글을 눈여겨본 출판인이 책을 내자고 해서 2017년 소설집 ‘저주토끼’를 출간했다. 그 책이 한국문학 전문번역가 안톤 허에게 발견돼 지난해 여름 영국 출판이 이뤄졌다. 그리고 이 책이 노벨문학상 다음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이라는 부커상 후보에 오른 것이다. 한국 SF문학(과학소설)이 부커상 후보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8일 서울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정보라는 아직도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믿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게다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제가 너무 좋아하는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가 같은 명단에 있는 걸 보니 꿈인가 싶었다. 아, 내 인생 성공했구나, 그런 생각도 들더라 하하.”

무명 작가였던 정보라는 갑자기 세계적인 작가 대열에 들어섰다. ‘저주토끼’는 지난 5년간 3000부 정도 팔렸는데, 부커상 후보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로 2주 만에 4000부가 새로 판매됐다. 영국판 이후 해외 출판도 이어지고 있다. 10개국에 판권이 팔렸고 미국 대형 출판사도 출간을 검토 중이다.

정보라 소설에 대한 반응은 국내와 해외에서 너무 달랐다. ‘저주토끼’는 국내에서 어떤 문학상도 받지 못했다. 언론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영어로 출간되자 부커상 후보가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힌트는 장르에 있다.

부커상 측은 ‘저주토끼’(영국판 제목은 ‘Cursed Bunny’)에 대해 “정보라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활용해 현대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참혹한 공포와 잔혹함을 이야기한다”고 평가했다.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은 많다. 정보라의 독특함은 판타지와 호러, SF 등을 통해 이런 주제를 다룬다는 데 있다. 그는 SF 작가다. 이것이 그가 국내에서 비주류인 이유, 그리고 해외에서 호평받는 이유를 함께 설명해준다.

정보라는 “(대학생이던) 1998년 ‘머리’라는 작품으로 연세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20년 넘게 장르문학 작품을 써왔다”면서 “알려진 작가가 아니고 본업(강의와 번역)이 따로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쓰고 싶은 걸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머리’는 화장실 변기에서 머리가 나오고 그 머리가 자라 주인공을 변기 속으로 집어넣어 버린다는 이야기다. ‘저주토끼’에도 수록됐다. 그가 대학생 시절부터 환상문학 계열의 이야기를 쓴 데는 러시아 문학 연구자라는 배경이 작용했다. 정보라는 연세대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문학 박사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 등에서 10년 넘게 러시아 문학과 SF를 강의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와 동유럽 작가의 작품을 번역했다. 그는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면서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러시아 문학에선 현실과 상상을 딱히 구분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 소설 중에는 외계 행성에서 유토피아를 발견하는 작품도 있다. 고골의 ‘코’라는 작품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코가 없어졌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인데 그냥 쓴다. 꿈인데 어때, 어차피 소설인데 뭐, 그러면서 쓰고 싶은 대로 쓴다. 이런 이야기는 소설로만 가능하다. 소설은 쓰면 그냥 문장이 되니까. 현실성은 전혀 없는데 독자들을 끌고 가는 그런 소설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게 문학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하고. 나도 이렇게 쓰면 쓸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저주토끼’에는 10편의 단편이 실렸다. 표제작은 저주용품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난 손자와 그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뭐든지 먹어 치우는 토끼가 나온다. ‘몸하다’는 피임약을 먹고 임신하는 이야기, ‘안녕, 내사랑’은 자신이 만든 반려 로봇을 사랑하게 된 개발자 이야기다. 하나같이 기이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들인데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그리고 읽고 나면 궁금증이 생긴다.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지.

정보라는 ‘저주토끼’에 대해 “토끼를 갖고 이야기를 써야 했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무서운 토끼 얘기를 해보자, 이렇게 된 거다”라며 “토끼는 보들보들하고 귀여운 동물이다. 몸에 무기가 될 만한 게 하나도 없고. 그래서 토끼를 정반대로 무섭게 만들어 봤다”고 설명했다. ‘머리’라는 작품도 창작 과정이 비슷하다. “화장실 변기라는 건 뭔가 내려가면 안 나오는 구조다. 그런데 거기서 뭔가가 다시 올라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현실과 정반대 방향으로 생각한다. 그래야 얘기할 거리가 나온다.”

정보라가 만든 이야기들은 노골적으로 비현실적이지만 이질적이지 않고 거기서 전해오는 감정이나 메시지가 기묘하게 사실적이다. “이야기는 비현실적이지만 그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은 진실해야 한다”면서 “주인공이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감정을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정보라의 소설들은 따뜻하지 않다. 어둡고 쓸쓸한 분위기를 띤다. 문체도 건조하다. 하지만 번역가 안톤 허는 “매우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정보라는 자신의 문학을 고통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그는 “고통과 상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감정이고 가장 인간적인 경험”이라며 “너무 사실적으로 쓰면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고통스러우니까 피하고 만다.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쓰면 조금 흥미로운 과정을 거쳐서 감정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정보라에겐 ‘투쟁하는 소설가’라는 별명이 붙어있는데, 고통과 상실이라는 주제가 그를 그 방향으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세월호 유가족 천막을 지켰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는 오체투지도 했다. 최근엔 전장연(전국장애인철폐연대) 시위나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운동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인터뷰를 한 날에도 오전에 혜화역에서 열린 전장연 집회에 참석하고 왔다고 했다. 그는 “시위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하게 강렬하다.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저의 안온한 삶에서 운이 좋아서 겪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며 “진짜 인간의 삶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SF, 미스터리, 판타지 등을 포괄하는 장르문학은 흔히 즐거움을 위한 문학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작가들도 많다. 정보라는 장르문학을 통한 사회 비판이 가능하고 적절함을 보여준다. 한국 장르문학은 어느새 부커상 후보에 오르는 수준에 도달했다. 정보라는 20년 넘게 SF작가들과 함께 이 분야를 일궈왔다. 현재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다.

그는 “작지만 탄탄한 작가공동체가 있었고 독자공동체도 있었다”며 “그 속에서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좋아하고 위안이나 기쁨을 얻는 분들이 있음을 계속 확인해 왔다. 그래서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SF 없이 이야기를 쓰긴 어렵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도 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 속에서 성장한 세대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과학적 소재나 과학적 상상에 전혀 거부감이 없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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