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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온 입자, 광학, 유체, 색… 과학과 미술의 경계를 넘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한국관 작가인 김윤철씨가 지난 12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니스의 자르디니 공원 내 한국관에서 막바지 설치 작업을 하던 중 작품 앞에서 잠시 포즈를 취했다. 배경의 작품 ‘크로마’는 일종의 매듭이 지어진 가로 8m의 대작으로 거대한 용이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매듭을 다 풀면 총 길이가 50m다. 무게도 400㎏이다. 김윤철 작가 제공


‘크로마’의 키네틱 장치가 정상 가동됐을 때 총천연색으로 빛이 나는 모습. 김윤철 작가 제공


한국관이 95년 생긴 이래 처음으로 천장을 뜯어낸 모습. 김윤철 작가 제공


내비게이션이 도착지라고 알려준 곳은 상가 건물 앞이었다. 순간 잘못 왔나, 당황했다. 통념상의 작가 작업실과 너무 달라서였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선 1층은 더 휑뎅그렁했다. 이탈리아 베니스로 작품을 모두 보낸 뒤였다. 텅 빈 내부는 금속을 깎는 기계, 금속에 구멍을 내는 밀링머신, 레이저 커팅기 등이 있어 작은 사출업체 같은 인상을 줬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이 오는 23일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개막해 7개월 대장정에 들어간다. 한국관 작가인 김윤철(52)씨를 만나러 지난달 31일 경기도 양주 작업실로 찾아갔다. 베니스 현지로 출국하기 전날 저녁에 시간을 내줬다.

김윤철의 미술 작업은 작업실 풍경만큼이나 독특하다. 중세 연금술사의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작업이다

“액체를 갖고 작업합니다. 나노 입자, 빛, 광학과 관련된 유체를 갖고 작품을 만들지요.”

그의 작업을 처음 본 건 2019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바라캇컨템포러리 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에서였다. 그는 중동계 자본으로 해외 유망 작가를 한국에 소개해 온 이 갤러리가 한국인으로는 처음 뽑은 전속 작가였기에 미술인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그때 전시장에는 실험실 실린더와 튜브가 거대한 샹들리에처럼 매달려 있고, 투명한 액체가 내부를 흐르고 있었다. ‘충동’(임펄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 옆에는 ‘아르고스’(눈이 100개 달린 신화 속 동물)가 있다. 수십 개의 뮤온 입자 검출기가 아르고스의 눈처럼 달려서 우주에서 방출되는 뮤온 입자를 검출할 때마다 플래시를 터트리며 반응을 한다. 아르고스는 입자를 검출하면 이 신호를 ‘임펄스’로 보낸다. 그 결과 실린더와 관을 흐르는 액체가 속도를 바꾸고 갑자기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기도 한다. 다른 작품 ‘크로마’는 실리콘 같은 고분자폴리머가 용의 비늘 같은 특수필름에 붙어 있다. 아크릴과 알루미늄으로 된 키네틱 장치에 의해 움직이면서 그 압력에 따라 무지개처럼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희한한 작품이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그때 선보인 작품들과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이 덩치를 크게 키운 채 ‘부풀은 태양’ ‘신경(신이 다니는 길)’ ‘거대한 바깥’ 등의 시적 비유로 재등장한다.

작품을 전시하는 한국관 건물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다. 1895년 창설된 베니스비엔날레는 매회 선정되는 총감독이 선보이는 국제전과 국가별 경쟁이라는 두 축으로 이뤄진다. 국가 대항전은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나라마다 자신의 건물이 있어 그 안에서 전시를 한다. 한국관은 1995년 26번째 마지막 국가관으로 생겨났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93년 독일관 대표 작가로 참여해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뒤 모국인 한국관 건립을 위해 백방으로 뛴 결과다. 하지만 원래 화장실이었던 사각진 건물 한 동에 둥근 원호 모양의 투명한 전시관이 붙은 얼개라 전시를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베니스에 가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전시장을 어떻게 할까 고민됐어요. 건축물에 순응하느니 차라리 천장을 떼어내 보자, 화이트큐브(갤러리의 흰색 사각 벽) 성격을 없애보자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뭐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결정했는데, 초창기 건축물의 목조 뼈대와 아치형 유리창이 그대로 노출된 사진을 받아보곤 굉장히 기뻤습니다. 날것의 풍경과 제 작품 사이에서 긍정적인 충돌이 생겨날 것 같았거든요. 건물 자체가 노아의 방주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천장이 뜯긴 건 처음이다. 서까래 같은 목재가 그대로 보이고 확 뜯어낸 유리창으로 하늘과 나무가 보이는 전시장에 용이 용틀임하듯이 매달린 ‘크로마’, 100개의 눈을 가진 외계인 같은 설치물인 ‘아르고스’가 거친 숨소리를 내는 동물처럼 설치된 전시장 풍경이 너무 궁금해 베니스로 날아가고 싶었다.

크로마는 색에 대한 통념을 바꾼다. 곡면 뼈대에 붙은 실리콘이 키네틱 장치가 움직일 때마다 스스로 탄성도를 조절해 색을 바꾸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는 빨간색은 빨간 물감을 칠해야 나오는 색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특수한 물질이 기계가 주는 압력에 의해 스스로 색을 발현할 수도 있다. 과학에선 이걸 구조색(스트럭처 컬러)이라 한다. 10년, 20년 후에는 염료로 색을 바르는 게 아니라 이처럼 물질의 구조를 바꿔 색을 내는 시대가 온다”고 강조했다.

놀라운 건 색에 대한 개념뿐이 아니다. 뮤온 입자 등 우주과학에서 쓰는 용어가 미술 전시에 등장하니 과학기사를 쓰는 기분이 들 정도다.

“2016년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가 매년 예술가 1명을 선정해 수여하는 ‘콜라이드국제상’을 받았습니다. 이곳은 세계 최대 규모의 입자가속기 연구소입니다. 이 연구소에 초대돼 3개월간 머물며 과학자들과 함께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작품도 스케치하면서 이런 구상이 나오게 됐습니다.”

그가 미술계를 넘어 과학계에 영감을 주고 과학계에서 영감을 받는 작가로 평가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에서도 중요한 것은 조형물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평소 인식할 수 없는 우주적인 현상을 감지하고 시각화할 수 있다는 새로운 미술 개념 자체다.

한국관 전체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나선’이다. 영국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대표작인 ‘재림’(The Second Coming)의 첫 구절, “나선처럼 점점 넓어지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돌다 보니~”에서 땄다. 예이츠는 과거 문명이 물러나고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격렬한 움직임을 두 원뿔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나선의 이미지로 그렸다.

작가는 “초유의 전염병인 코로나를 통과하는 지금 시대가 예이츠가 말한 나선형의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작품도 크로마 등에서 보듯이 나선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한국관 전시 작품은 코로나의 역습이 각성시켜준 ‘포스트 휴먼’ 상황과도 연결된다. 지구는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인 동물과 사물도 함께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각성 말이다. 예술품은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었지만 그의 작품에서 보면 스스로 스스로 행위자가 된다. 작가와 작품이 동등한 지위가 되는 놀라운 작품이다. 그는 “이번 전시는 포스트휴먼시대, 물질이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전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경계를 넘는 사유를 하다니 도대체 어떤 인생 역정을 걸어온 거야, 궁금해졌다. 추계예술대학에서 현대음악을 전공한 그는 어쩌다 미술을 하게 됐을까.

“대학 3학년 때입니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하는 홍성담 작가가 자신의 비디오 작품에 배경 음악을 제작해달라고 의뢰했습니다. 비엔날레를 며칠 구경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백남준 선생님이 신시아 굿맨과 함께 특별전 디렉터를 맡았는데, 그때 정말 좋은 미디어 테크놀로지 아트를 봤습니다. 레이저 작품, 음악가가 하는 사운도 작품, 설치 음악…. 정말 다채로운 장르를 보면서 제가 해오던 것들이 헛된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학교 교수님들은 ‘딴생각하지 말고 곡이나 써’ 했는데 말입니다.”

이후 음악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무용 미술 등 다른 장르 예술가들과 활발히 접촉하며 외연을 확장했다. 결정적으로 독일 쾰른매체예술대학교로 유학을 가면서 미술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한국관 전시 주제가 국제전 총감독이 된 미국의 세실리아 알레마니가 나중에 제시한 ‘꿈의 우유’와 맞아떨어져 놀랐다고 했다. 꿈의 우유는 초현실주의적 상상에 착안해 신체의 변형, 개인과 기술의 관계, 신체와 지구의 연결 등 세 가지 소주제로 구성된다. 한국관은 김윤철 작가를 러닝메이트로 해서 공모에 응한 이영철 계원예술대 교수의 주제 ‘캄파넬라: 부풀은 태양’이 선정됐다. 통상 감독이 중심이 돼 꾸리지만 이번에는 감독을 둘러싼 잡음 탓에 작가에게 무게중심이 쏠리는 형국이 됐다.

김윤철은 지금 한국 예술계에서 미술작가로 통한다. 그럼에도 그는 “음악은 제게 모국어다. 그 정체성은 지금도 안 버리고 있다. 이력서엔 항상 ‘작곡가이자 설치미술가’라고 쓴다”고 했다.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중인 9월 한국관 앞에서 콘서트를 열어 ‘음악가 김윤철’도 보여줄 계획이다. “재주는 음악과 이것밖에 없죠.” 음악에서 출발해 미술로 옮겨간 그에게는 백남준의 피가 흐른다.

양주=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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