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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일이 틀어질 때



‘옥수수 박사’ 김순권 한동대 석좌교수는 일이 잘 풀리는 사람 같았다. 젊을 때 전공 선택을 잘해서 옥수수로 사람도 살리고, 통일 운동도 하고, 요즘엔 기후변화 억제 운동까지 활동 반경을 넓혔다. 비슷한 연배 사람들은 인생을 마무리하는데, 올해 희수(77세)를 맞은 그는 지금도 할 일이 태산이다. 남들은 엄두도 못 내는 노벨평화상에 세 번, 노벨생리의학상에 두 번씩 후보에 올랐으니 복도 많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며칠 전 경북 포항에 있는 김 교수를 만나 얘기하면서 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의 그를 만든 건 오히려 일이 잘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골 출신인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원이라도 돼야겠다 싶어서 부산상고를 지원했다가 낙방했다. 울산농고 졸업을 앞두고선 농협에 입사 지원서를 썼다가 또 떨어졌다.

경북대 농대에 들어간 뒤 서울대 대학원에 도전했는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공무원 시험을 쳐서 입사한 곳이 농촌진흥청이었다. 당시만 해도 쥐꼬리 월급에 인기 없는 직장이었다. 작물시험반 소속이었던 그는 통일벼팀에서 일할 줄 알았다. 당시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고, 쌀 증산에 온 힘을 쏟던 터라 전망이 밝은 부서였다.

그런데 자리가 다 차는 바람에 밀려난 곳이 옥수수 연구팀이었다. ‘인생의 동반자’ 옥수수를 만나기까지 그는 자신이 바라고 계획했던 대로 이뤄진 게 거의 없었다. 번번이 시험에 떨어지고 원치 않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그는 “‘하나님이 불쌍한 시골 촌놈을 그냥 내버려 두시겠나. 잘 인도해 주시겠지’ 하는 마음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교수는 “내가 만약 상고에 합격했거나 농협에 입사했으면 벌써 정년퇴직해서 집에서 빈둥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대학원에 붙었더라면 어땠을까. 옥수수를 연구하는 육종 과학자의 길을 걷진 않았을 거라고 했다. 지나고 보니 중요한 고비마다 일이 틀어졌을 때가 오히려 인생길이 열리던 순간이었다.

우리 인생이 모두 김 교수 같진 않을 것이다. 일이 꼬이거나 잘 풀리지 않으면 원인을 분석하고, 약점을 보완해 해법을 찾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다시 준비하고 끈질기게 도전하는 이들도 꽤 많이 보아왔다. 그럼에도 누군가 세밀하게 간섭하는 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옥수수 박사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옥수수 박사를 생각하다 떠오른 건 요셉이라는 성경 속 인물이다. 요셉의 인생 초반은 여기저기에 팔리는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그를 ‘형통한 자’라고 표현한다. ‘형통’이란 모든 일이 뜻한 대로 잘돼 간다는 의미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상인에게 팔린 뒤 다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렸다. 이어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옥에 갇힌 순간에도 그를 형통한 자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의 일생을 하나님이 풀어가는 이야기의 틀에서 바라보면 종으로 팔리고 옥에 갇히는 순간들이 결국 형통의 길로 향하는 통로였음이 드러난다. 일이 꼬이고, 잘 안 풀린다고 절망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낙심하고 주저앉아 버린 경우다. 일이 틀어지고 막힐 때면 지레 겁먹고 포기하거나 다급한 마음에 불법을 저지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연약하고 완악한 인간의 본성 탓일까.

김병삼(만나교회) 목사가 최근 한 유튜브 프로그램에서 건넨 메시지가 있다. 그는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나에게 왜 (더 나은) 환경을 주시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은 내려놓으라고 권한다. 그 대신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고 믿는다면 현실을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나에게 이 상황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기도 같다.

박재찬 종교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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