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남동부의 항구도시 마리우폴은 16세기 코사크 전사들의 요새였던 곳이다. 갈깃머리와 긴 콧수염으로 유명한 자포르지아 코사크는 여러 코사크 부족 중 가장 용맹했다는데, 그들이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잇는 요충지에 칼미우스란 이름의 요새를 건설하면서 이 도시가 시작됐다. 19세기 들어 돈바스의 지하자원을 나르는 항구로 개발됐고, 1933년 소련이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지었다. 2차 대전에 파괴됐다가 재건된 아조우스탈은 유럽 최대 철강공장이다. 11㎢ 광활한 부지에 연간 400만톤의 철강과 120만톤의 압연제강을 생산하는 시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마리우폴에는 도시 밑에 도시가 있다”는 말은 이 제철소 때문에 생겨났다. 원료와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공장 건물들을 연결한 지하터널이 미로처럼 조성돼 있다. 깊이는 최고 30m까지 내려가고, 길이는 총 20㎞에 달한다. 두꺼운 콘크리트벽과 겹겹의 철문에 둘러싸여 독자적인 통신망까지 갖춘 이곳을 아조우스탈 경영진은 2014년 이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당시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는 과정에서 마리우폴도 한때 점령당했던 터였다. 미래의 전쟁에 대비하려 지하터널의 낡은 시설물을 보수하고 비상식량과 물을 비치했다. 최대 4000명이 적어도 3주 동안 버틸 수 있는 환경을 갖췄다고 한다.
원래 요새로 건설된 도시의 숙명인지, 이 지하터널은 러시아의 침공 이후 지하요새가 됐다. 요충지를 차지하려는 러시아군 의 집중포화에 폐허가 된 마리우폴. 그곳의 얼마 남지 않은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민간인 수천명과 함께 아조우스탈 지하 공간에서 버티고 있다. 제철소를 완전히 포위한 러시아군은 연일 포탄을 쏟아붓는다. 엊그제 우크라이나 정보 당국이 감청한 러시아 지휘관의 통신 내용에는 “3톤짜리가 아조우스탈에 떨어질 것”이란 대목이 있었다. 지하요새를 파괴할 폭탄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수많은 생명의 비참한 땅속 죽음이 예고됐는데, 뻔히 알면서도 막아낼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전쟁은 미친 짓이다.
태원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