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뒀던 자리나 사람 이름을 자주 까먹는 등 일시적으로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건망증으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 계속 반복되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진다고 느껴지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닌 인지장애나 치매 등 퇴행성 뇌질환을 의심해 봐야 한다. 고령사회 진입 이후 치매 인구는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치매 진료 환자는 2017년 10만716명에서 지난해 11만6504명으로 약 16% 상승했다. 최근에는 50대 이하 중년층에서의 발병률도 높아지고 있다.
치매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원인에 의해 시작된 뇌의 병적인 노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면서 나타난다. 일단 치매가 진행되면 일상생활을 지내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예방과 초기 진단 및 관리가 중요하다.
이화여대목동병원 신경과 김건하 교수는 16일 “현재까지 알츠하이머병 등 일부 치매 치료제가 나와 있기는 하지만 증상을 완화하거나 진행 속도를 늦출 뿐 근본적인 치료 약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따라서 초기 증상이 느껴질 때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 인지기능 평가와 뇌질환 여부 진단을 정확히 하고 늦지 않게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치매 진행 이전 ‘경도인지장애’나 ‘주관적 인지장애’ 단계에서 미리 예방·관리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치매 직전 단계인 경도인지장애는 기억장애 또는 다른 인지기능 장애가 있지만 일상생활에는 별 지장이 없는 상태다. 단순 건망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자주 뭔가를 잊어버린다. 특히 최근 일을 자꾸 깜빡깜빡하거나, 이전에는 잘 해내던 일을 갑자기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계산 실수가 잦아진다면 경도인지장애를 의심해야 한다. 비슷한 학력 수준이나 연령대보다 인지기능, 특히 기억력이 떨어져 있으나 지하철·버스타기, 전화걸기, 식사 준비·설거지 등 일상생활 수행 능력은 보존돼 있어 치매라고 할 정도로 심하지 않은 단계다. 치매는 기억력뿐 아니라 다른 인지기능이 점차 떨어지고 급기야 이런 일상생활 수행이 불가능해진다.
65세 이상의 경도인지장애 발병률은 약 10~20%다. 경도인지장애 환자의 20%는 시간이 지나면서 호전되기도 하지만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되지는 않는다. 호전되는 사람도 경도인지장애가 없는 사람에 비해 치매 발병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 정상인의 경우 매년 1~2%가 치매로 진행하는데, 경도인지장애 환자는 10~15% 정도가 치매로 진행된다.
최근 학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게 ‘주관적 인지장애’다. 이는 경도인지장애의 전단계에 해당되는데, 스스로는 기억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전문 신경심리검사를 해 보면 인지기능에 이상이 없는 게 특징이다. 즉 인지능력검사에서는 정상 수준의 뇌기능을 보이나 자신은 “기억력이 떨어졌다” “깜빡깜빡하는 경우가 잦아졌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알츠하이머 치매의 원인 독성물질인 ‘베타 아밀로이드’는 기억력이 객관적으로 떨어지는 경도인지장애 단계 20~30년전부터 뇌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는데, 초반에는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최성혜 인하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독성물질이 조금씩 쌓이면서 ‘어? 과거 보다 깜빡깜빡하는 것 같은데’라고 느끼게 되고 이 때 병원에 가서 자세한 인지기능검사를 해 봐도 정상으로 나온다. 이 단계가 주관적 인지장애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학계에서는 의학적 검사에서 나타나지 않더라도 개개인이 인지능력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 나타내는 증상으로, 초기에 발견해 치매로의 진행을 막는 ‘골든타임’으로 평가하고 있다. 주관적 인지장애 환자 중 1년에 약 6.6%가 경도인지장애로, 2.3% 정도가 치매로 진행하는 것으로 보고돼 있다. 주관적 인지장애를 호소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치매 발병 위험이 배 가량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따라서 이런 인지장애가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뇌기능개선제 복용 등을 통해 혈관 위험인자를 조절하고 증상이 악화되는 것을 미리 예방할 필요가 있다. 뇌기능 개선 약물로 흔히 쓰이는 것이 세포 사이 신경전달물질이 원활히 공급되도록 도와주는 ‘아세틸콜린(콜린알포세레이트)’이다. 다만 구역질 위염 등 소화기 부작용이 있을 수 있고 졸음 불면 신경질 등이 나타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일반 영양제로 널리 쓰이는 은행잎추출물 혈액순환제도 뇌기능개선에 도움이 된다. 은행잎추출물은 혈액순환 개선과 함께 항산화 작용(뇌신경세포 보호 및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 흐름을 원활히 함)으로 뇌활동과 인지기능 장애 개선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현재 기넥신(SK케미칼), 타나민(유유제약) 등 40여개 제품이 나와 있다. 가장 많이 처방되는 기넥신의 경우 최근 하루 한번 뇌기능 개선에 필요한 성분을 복용할 수 있는 240㎎ 고용량 제품이 출시돼 복용 편의성이 높아졌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