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힘들어서 정말 죽을 것 같아도, 살아있어서 행복한 순간이 언젠가는 찾아와. 설령 아주 소소한, 대단하지 않은 순간들이어도.”
라마 작가의 웹툰 ‘내일’에 등장하는 저승사자 구련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살을 막는 저승사자다. 저승사자들이 소속된 ‘주마등’이란 회사의 위기관리팀장이다. 이 웹툰에는 구련을 포함한 위기관리팀 사자들과 그들이 만난 자살 시도자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 별로 담겨있다. 등장인물들이 소중한 삶을 스스로 버릴 만큼 힘든 이유는 다양했다. 학교폭력이나 성폭력의 피해자, 학업으로 힘든 재수생, 체중 강박증에 시달리는 여성, 발달장애인 가족으로서 받는 차별과 무시…. 구련은 이들이 다시 살아갈 용기를 갖도록 돕는다.
이 작품을 그린 라마 작가는 위기관리팀 사자들의 입을 통해 독자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외모 강박증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한 여성은 “나는 다른 사람에게 평가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으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을 위하느라 정작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에게 구련은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라’고 역설한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본 실패 때문에 지금 잠시 힘든 상태일 뿐이야”라는 구련의 말에서 독자들은 위로를 받았다.
‘내일’의 독자들은 “매회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웹툰”이라고 입을 모은다. 2017년부터 지금까지 연재를 이어오며 탄탄한 팬덤이 형성됐다. 지난달 1일부터 이달 21일까지는 MBC 드라마로 방영됐다.
라마 작가는 지난 24일 국민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자살은) 더이상 발 디딜 곳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코너에 몰렸기 때문에 등 떠밀려 하게 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의 주변인, 나아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응원과 위로, 공감이다. 하지만 진심 어린 위로의 말 한마디 듣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은 각박해졌다. 라마 작가는 “응원 위로 공감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기 때문에 내 안에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며 “각자 짊어진 짐이 있다 보니 타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상처를 주곤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라마 작가가 ‘내일’을 연재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겪은 불의의 사건이었다. 대학생 시절 자살 현장을 목격했는데, 후일 자살자가 어머니 지인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혹시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줬더라면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전부터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라마 작가는 “삶과 가장 가까운 게 죽음”이라며 “죽음은 모든 인간 서사의 마무리”라고 했다.
이 작품을 연재하면서 탁월한 공감 능력을 가진 그의 역량이 빛을 발했다. 라마 작가는 “심리상담센터에서 기질검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다른 사람보다 공감 능력의 수치가 월등히 높았다. 100명 중 1~2등이었다”며 “뉴스를 통해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면 제 일도 아닌데 자꾸 생각나고 마음이 아프다”고 전했다.
‘내일’이란 제목에는 세 가지 뜻을 담았다. 죽음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픔을 딛고 맞이할 ‘내일’, 다른 사람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는 이들, 그리고 구련 등 위기관리팀 사자들이 해야 하는 일을 뜻하는 ‘내 일’이다.
‘내일’은 저승세계에 대한 판타지적 설정이 세밀하고 현대적이다. ‘주마등’의 회장은 옥황상제, 사장은 염라대왕이다. 위기관리팀은 자살 시도자의 자살 생각을 백분율로 감지하는 ‘레드라이트’ 앱을 활용한다. 라마 작가는 “‘저승에도 회사가 존재하지 않을까’ 상상했다”며 “레드라이트 앱은 저승에서도 업무에 필요한 여러 장치를 만들어낼 것이란 생각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이 앱은 자살시도자가 느끼는 삶의 고통을 수치로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
창작자로서 가장 몰입해 작업한 에피소드는 발달장애 형을 둔 민우를 그린 ‘함께’ 편이었다. 장애인 가족으로서 민우가 편견과 무시에 아파할 때, 라마 작가도 억울함과 분노를 느꼈다. 민우 어머니가 장애가 있는 아들을 키워오면서 겪은 갖가지 어려움도 마음을 울렸다. 작업하다 눈시울이 젖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라마 작가는 “한 화, 한 화 콘티를 짤 때마다 감정적인 소모가 참 컸다. 마지막 컷을 그리고 만화가 업로드된 후에도 여운이 남았다”고 회상했다.
웹툰 속 등장인물이 겪는 고통은 멀리 있는 일이 아니었다. 라마 작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 겪는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했다. 그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 왜 벼랑 끝에 몰릴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렇다고 자살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라마 작가는 “자살은 옹호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자살이 죄다, 아니다 하는 식의 논의보다는 당장 위기에 처한 한 사람이라도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내일’은 사회적으로 예민하고 건들기 어려운 문제도 섬세하게 풀어나간다. 성폭력 피해자, 장애인 가족, 위안부 문제 등은 주의를 기울여 한 땀 한 땀 작업했다. 자칫 읽는 사람이 반감을 갖거나 공감하지 못할 수 있지만 ‘내일’의 스토리텔링에는 걸림돌이 없다.
그 이면엔 작가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성폭력 문제를 다루기 위해 라마 작가는 대법원의 관련 판례를 거의 다 찾아봤다. 표현 하나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인 ‘숨’편을 작업하면서 “실제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내 표현에 더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두려웠다”며 “콘티를 짜려고 워드프로세서 창을 켤 때마다 손에 땀이 났다”고 했다.
자살을 막는 저승사자의 활약은 실제 현실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내일’을 보고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만화를 그리고 싶었던 라마 작가에겐 값진 일이었다. 그는 “제 작품을 보고 극단적 선택의 기로에서 마음을 바꿨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마음이 뭉클해졌다”고 했다.
웹툰을 그리기 전에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미대를 졸업하고 디자이너로 일했다. 학창시절 만화를 좋아해 장래희망으로 막연하게 ‘만화가’를 꼽은 적은 있지만, 진지하게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라마 작가는 “회사 생활을 하던 중 문득 웹툰을 그리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 도전했다”고 말했다.
독자들에게 어떤 작가로 남고 싶은지 묻자 “잠 못 드는 새벽이 되면 문득 생각나는 작품을 그리는 작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