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는 천재 앵무새였다. 야바위꾼처럼 파스타 조각들이 담긴 컵들을 하나씩 보여준 뒤 모두 몇 개냐고 물으면 단번에 정답을 맞히곤 했다. 초록색 큰 블록과 빨간색 작은 블록을 놓고 어느 색이 작은지 물어보면 “빨간색”이라고 답했고, 헤어질 땐 “잘 지내(You be good)”라거나 “사랑해(I love you)”라고 인사했다. 2007년 9월 7일 알렉스가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뉴욕타임스엔 이런 부고가 실렸다고 한다. “알렉스는 개성 넘치는 농담을 할 줄 아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앵무새였다.”
나는 2010년 5월 샴 고양이를, 2016년 4월엔 닥스훈트 강아지를 차례로 입양해 키우게 됐다. 이들 동물과 동고동락하면서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나는 여전히 저들의 능력치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동물의 사고력이 인간의 그것에 비해 한참 달린다고 단정한다. 사고의 둘레를 결정한다고 여겨지는 언어의 수준이 인간보다 많이 떨어지니 사고의 깊이도 얕을 거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과연 옳을까. 네덜란드의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저서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나는 과연 내가 단어로 생각을 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면서 이렇게 적었다. “언어가 범주와 개념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사고를 돕기는 하지만, 사고의 재료는 아니라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생각하는 데 실제로 언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려동물에서 반려(伴侶)는 ‘짝(伴)이 되는 친구(侶)’라는 뜻이다. 나의 반려동물 가운데 고양이는 12년을 함께한 나의 단짝이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로 이어진, 어쩌면 인생의 환절기 같았던 나의 30대 시절을 나는 고양이와 함께 보냈다. 지금도 나는 고양이와 한 이불을 덮고 자고, 집에 오면 가장 먼저 고양이부터 찾는다.
올해로 열세 살이 된 고양이는 사람 나이로 치면 60대 중반이다. 최근엔 복부에 갑자기 피멍이 들어 병원 진료를 받았는데 혹시나 중병에 걸린 건 아닐까 걱정돼 무시로 까마득한 슬픔을 느끼곤 했다. 소설가 김영하는 에세이 ‘여행의 이유’에서 자신의 삶에 애틋함의 무늬를 남긴 반려동물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 이렇게 적었다.
“나에게 녀석들은 반려가 아니라 여행자에 가깝다.… 긴 여행을 하다 보면 짧은 구간들을 함께하는 동행이 생긴다. 며칠 동안 함께 움직이다가 어떤 이는 먼저 떠나고, 어떤 이는 방향이 달라 다른 길로 간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렇게 모두 여행자라고 생각하면 떠나보내는 마음이 덜 괴롭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환대했다면 그리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김영하의 말처럼 내게 고양이는 인생의 여정에서 잠시 동행한 여행자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양이에게 나는 다른 의미를 띨 게 분명하다. 소설가 윤이형은 2019년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라는 소설로 이상문학상을 받은 뒤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반려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고양이가 세상을 떠난 뒤 느낀 무력감을 토로했다. “내 고양이가 죽었다는 걸 나만큼 슬퍼할 사람이 없어. 고양이는 집에서 사니까 태어나서 만나본 생명체가 많지도 않은데.”
지구에 와서 “만나본 생명체가 많지도 않은” 삶을 살았으니 우리집 고양이에게 나는 마음을 주고받은 거의 유일한 존재일 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면 나는 항상 코끝이 알싸해지곤 한다. 언젠가 내 고양이도 세상을 떠나겠지만 마지막 순간엔 고양이도 나처럼 가없는 슬픔을 느낄 거라고 믿는다. 물론 우리집 고양이가 알렉스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잘 지내”라거나 “사랑해”라는 작별 인사를 할 린 없겠지만 말이다.
박지훈 종교부 차장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