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초겨울까지, 수녀원 마당에서 장미는 피고 지기를 잇대었고, 지면서 더욱 피었다. 꽃 한 송이는 죽음의 반대쪽에서 피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꽃이 지는 것이 죽음은 아니었다.”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죽음을 묘사한 이 두 문장만으로도 글쓴 이가 김훈(74)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칼의 노래’ ‘달 너머로 달리는 말’ 등 장편소설과 ‘라면을 끓이며’ ‘연필로 쓰기’ 등 산문집을 낸 김훈이 ‘강산무진’ 이후 16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을 들고 돌아왔다.
비루한 인간사를 허무하게 바라보는 시선, 간결한 문장으로 압도적인 묘사를 선보이는 특유의 문체에 애틋한 감정이 더해졌다. 인간의 생애는 그들의 고통이나 절망과 관계없이 무심하게 흐르고, 시간은 신체를 허물어 간다. 인간은 그저 겪어낼 뿐이다. 김훈은 나약한 인간이 멈출 수 없는 시간 속에서 풍화되어 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표제작 ‘저만치 혼자서’는 호스피스 수녀원에 살게 된 나이든 수녀들과 그들을 편안한 임종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심성의껏 봉사하는 젊은 신부의 나날을 그린다. 성직자들조차 죽음이라는 미지의 사건에 대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번민한다.
‘저녁 내기 장기’는 가정이 해체되고 일터에서 밀려나는 등 각자의 비극을 품은 인물들이 장기 두기로 노년의 외로움을 견디는 모습을 보여준다. 안구건조증이라는 보편적인 노화 증세를 통해 노년의 애환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대장 내시경 검사’에서는 직장에서 은퇴한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탁받은 일들을 대장 내시경 검사 이후로 미룬다. 검사 결과가 좋지 않을 땐 더 고민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다. 그 일들을 생각하면서 주인공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린다.
단편 일곱 편을 묶은 이번 소설집에서 김훈은 일상적인 인물과 사건을 다룬다. 역사나 시대, 주제 같은 거대 담론을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생로병사를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 담담한 문장들이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감정은 먹먹하다.
김훈은 책 뒤에 이례적으로 길게 ‘군말’을 덧붙였는데, 수록된 작품들을 쓰게 된 과정을 전하고 노년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또 이번 작품들은 작가가 아닌 이웃의 자리에서 썼다고, 그럼에도 문학의 언어로 삶의 언어를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군말’에서 김훈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 복도에서 50년 만에 대학교 동창생을 마주친 이야기를 했다. 두 친구는 심장 때문에, 디스크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가 만났다. 김훈은 “우리는 이런 하나 마나 한 얘기를 몇 마디 주고받고 헤어졌다. 생로병사는 이처럼 가벼운 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후에 그 친구가 어찌되었는지는 모른다. 슬픔과 고통이 세월에 의해 풍화되면 마음속에는 환영이 남는다. 환영은 무기력하지만 아릅답다”고 썼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