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오후 3시가 돼서야 초인종을 눌렀다. 아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미술가 이승택(90)은 건강관리를 위해 점심 식사 후엔 꼭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어서다.
지난 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겸 작업실을 찾았다. 마당까지 기자 일행을 맞으러 나오는데, 단잠을 잔 뒤의 어린아이처럼 표정이 환했다. 마당에는 시그니처 작품이 된 ‘매어진(묶은) 돌’ 연작이 정원석처럼 포치된 것이 멋스러웠다.
이승택은 1959년 홍익대 미대 조각과를 졸업했다. 조각이라고 하면 나무, 돌, 브론즈로 만든 작품을 생각하던 시대였다. 그는 비닐 옹기 유리 등 일상적인 물건을 조각 재료로 가져와 작업했다. 돌이나 자소상을 노끈으로 묶는 작업을 하거나 줄에 천 조각을 걸어 바람을 시각화했다. 60년대 앵포르멜(유럽의 추상 회화)이 유행하며 조각에서도 추상 조각이 대세였던 시절이었다. 이승택은 어깃장을 놓듯 실험적인 ‘설치미술’을 했다.
그는 74년 국립현대미술관(당시 덕수궁)에 ‘매어진 바윗돌’ ‘매어진 대리석’ 등 이른바 ‘매어진 돌’ 연작을 선보이며 미술계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국립기관이 갖는 권위가 작용했다. 77년에는 건축 잡지 ‘공간’이 주최한 공간대상전에서 ‘매어진 바윗돌’이 조각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이 연작은 이후 옛 서책을 묶고 캔버스를 묶고 도자기를 묶는 등 다양하게 변주된다. 나중에는 묶는 대상을 바꾸는 것에서 나아가 묶는 재료인 밧줄을, 붓을 휘두르듯 캔버스에 붙이는 ‘밧줄 드로잉’으로 진화한다.
돌을 묶는 것은 혁명적인 발상이다. 돌에 홈을 판 뒤 그 홈을 따라 노끈을 묶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딱딱하고 무거운 돌이 아연 밀가루 반죽처럼 가볍고 말랑말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물렁물렁한 돌멩이’가 된다. 돌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버리는 ‘묶은 돌’ 연작이 “세계 최초”라고 그는 자부했다.
이 참신한 생각은 어디서 나온 걸까. 함경남도 고원군 태생인 그는 대학시절 얘기를 꺼냈다. 원래 “남의 땅을 밟지 않고도 이웃마을로 갈 수 있는”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때 일제에 의해 토지를 약탈당하면서 집안이 망했다. 미대에 진학했지만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입장료를 낼 형편이 못됐다. 회화과의 경우 덕수궁에서 그림을 그리면 입장료가 무료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날 회화과 학생들에 묻혀 입장했다. 자신은 조각과라 그리지는 않고, 이곳저곳 구경하다 한쪽에 있는 전시장 안을 들여다보게 됐다.
“전시된 고드랫돌(돗자리를 짤 때 쓰는 무게 추. 돌이나 나무로 제작)을 본 거야. 기가 막히게 좋은 거야. 그걸 따라 만들었어요. 57년쯤이야. 돌멩이에 홈을 파려면 정으로 쪼아야 하는데 쉽지 않았어요. 조금만 힘을 줘도 돌이 쩍 갈라지거든. 겨우 파낸 홈에다 노끈을 맸어요. 처음에는 작품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걸어 두기만 했어. 너무 좋아서 밤낮 그것만 쳐다봤어요.”
사람들은 ‘이게 무슨 조각’이냐고 비아냥댔다. 그는 당당히 ‘비조각’ 개념을 창안해 비판을 받아쳤다. 80년 5월 미술 잡지 ‘공간’에 에세이 ‘내 비조각의 기원’을 발표한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미술의 경계를 허물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90년대 한국에 수입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외고집 같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보았고, 거꾸로 생각했고, 거꾸로 살았다”는 글자로 써서 작품(2001)으로 내놓았다.
남과 다른 길을 걸어온 삶을 그는 기질 탓으로 돌렸다. 같은 걸 반복하는 걸 참지 못했다. 슬며시 웃더니 대학시절 일화를 꺼냈다. 당시 강사였던 미술평론가 A씨가 첫 시간에 했던 연애 이야기를 둘째 시간에 또 하자 그는 손을 번쩍 들어 말했다. “왜 첫 시간에 했던 똑같은 이야기를 하느냐. 예술론은 언제 이야기하느냐. 서론은 그만두고 본론부터 시작하자”라고. 강사가 얼굴이 벌게져 강의실을 나갔음은 물론이다.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팔리지 않을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기념 동상, 초상 조각 등을 수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조각’을 했음에도 리얼리즘 조각 실력이 엄청나게 좋았던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 얼굴을 똑같이 만들었다. 교장 선생님이 깜짝 놀라 교장실 뒤에 두고 감상했던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윤효중 김경승 등 홍대 교수들이 수주한 동상 등 기념 조각을 ‘대작’했다. 수주는 교수 이름으로, 제작은 제자들이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77년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첫 일감을 따냈다. 한국일보 사장 ‘백상 장기영 흉상’, 방림방적 설립자 ‘서갑호 사장상’을 수주한 것이다. 이후 ‘이퇴계 선생’(단국대) ‘윤봉길 의사 동상’(독립기념관) 등 80여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동상 수주 덕분에 생계 걱정 없이 조각과 미술 개념에 균열을 내는 아방가르드한 작업을 해올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작품이 개념미술 대지미술 등 서구의 미술을 차용했다고 평가받을 때 제일 답답했다. 이를테면 62년 그는 옹기를 거꾸로 세운 뒤 재가 된 연탄을 뉘어서 그 위에 올린 설치 작업(‘작품’)을 선보였다. 이럴 때 연탄은 본래의 맥락을 벗어나 새로운 조형미를 뽐낸다. 이는 개념미술가 마르셀 뒤샹이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를 올려놓은 작품(‘자전거 바퀴’·1913)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뒤샹을 모를 때였어요. 뒤샹을 정말 몰랐어요. 뒤샹은 국내에 71년쯤 대대적으로 소개됐거든. 그걸 보며 ‘뒤샹의 작품이 내 연탄 작업과 비슷하구나’ 생각했다니까.”
그는 자신의 작품이 민속에서 영감을 받는 등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예컨대, 오지(붉은 진흙으로 만들어 약간 구운 다음, 오짓물을 입혀 다시 구운 그릇)를 탑처럼 세우거나 매다는 작업을 했는데, 이는 50년대 후반부터 남양주 퇴계원의 옹기가마를 드나들며 제작한 옹기를 오브제처럼 사용한 것이다.
이승택의 ‘비조각’은 일상적인 물건으로 작업한 것이 한 축이라면 바람 불 등 보이지 않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작업들이 다른 한 축이다. 홍익대 빌딩 사이에 줄을 매달고 푸른색 천을 걸어 바람에 휘날리게 한 기념비적인 작품 ‘바람’(70년) 등 바람 연작은 풍어제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많은 평론가가 내가 서구의 대지예술 행위예술에 편승한 걸로 이야기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것과 상관이 없어. 내가 하고 싶은 걸 계속해서 한 거뿐이에요.”
지금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작품들이지만 당시엔 그러지 않았다. 용기가 필요했다. 서울대와 홍대가 합동으로 조각전시회를 할 때 “그 바람 작품을 선보이니까 서울대 측에서 빨랫줄 작업이 무슨 작품이냐며 빼라고 해서 나만 빠진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석고 데생할 때 남들은 흰 종이에 연필로 까맣게 그리는데, 자신은 까만 종이에 백묵으로 비너스 전신상을 그렸다는 이승택. 그렇게 ‘거꾸로 미술’을 해온 인생이 외롭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물론이지”라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내 살길은 그것 말고는 없으니까”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는 후배 미술인들에게 용기를 당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용기입니다. 우리는 뭘 하려면 눈치 보잖아요. 이거 하다 욕먹지 않을까.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세요.”
고향 단옷날 씨름대회에서 소를 세 마리나 탄 장사였던 아버지의 건강을 물려받았다는 그는 지금도 작업 중이다.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나 아니면 작품이 못된 채 재료가 소멸될 거 같으니까 계속 만들고 있어요. 중요한 게, 나는 세상에 없는 거만 합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선 ‘이승택-(안)묶은’ 전을 하고 있다. 관람을 권한다. 7월 3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