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필리핀 17대 대통령으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취임했다. 민주화운동으로 쫓겨나 21년 집권을 마무리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아들이다. 취임식장에는 남편의 재임 시절 명품 구두와 보석 등을 사들여 ‘사치의 여왕’으로 불렸던 어머니 이멜다도 모습을 보였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취임식에서 “아버지는 독립 후 아무것도 없던 나라에서 큰 성과를 낸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독재자 마르코스 집안의 완벽한 부활이다.
마르코스가 독재자가 아닌 위대한 인물로 둔갑한 것은 ‘가짜뉴스’ 덕이다. 외신들은 마르코스 주니어 선거캠프가 ‘마르코스 시대’의 암울한 과거를 알지 못하는 젊은 유권자들을 파고들어 SNS에 가짜뉴스를 쏟아냈다고 전했다. “마르코스는 이미 부유해서 국고를 부정으로 빼돌릴 이유가 없었다” “국민을 사랑한 마르코스는 수많은 도로를 건설했고 국민에게 이로운 정책만을 펼친 의로운 사람이다”. 지지자들은 가짜뉴스를 굳게 믿었다.
한국 대선에서도 가짜뉴스가 판도를 바꾼 적이 있다. ‘병풍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유력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은 부사관 출신인 김대업의 거짓 폭로에 치명상을 입었다. 일부 언론은 김대업의 제보를 토대로 이회창의 두 아들이 체중 미달로 병역면제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사실무근으로 밝혀졌고 김대업은 대선 후 명예훼손 및 무고 등 혐의로 징역 1년10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2008년 가짜뉴스로 시작된 광우병 사태는 이명박 정권을 흔들었다. ‘한국인 광우병 발병률 95%’ ‘광우병은 공기로도 전염된다’ 등의 괴담이 퍼졌다. 수입 쇠고기에서 미국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이미 50%를 넘겼지만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린 사람은 없다. 최근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면서 백신과 관련된 가짜뉴스도 횡행했다. ‘백신이 DNA를 변형시킨다’ ‘빌 게이츠가 백신에 마이크로칩을 이식해 위치추적을 하려 한다’ ‘낙태아 폐 조직으로 백신을 만들었다’ 등이 SNS를 통해 퍼졌다. 철석같이 믿고 아직도 백신을 한 번도 맞지 않은 사람들이 꽤 많다.
최근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청년 정치인을 향한 공격에도 가짜뉴스와 가짜뉴스일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 활용됐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가짜뉴스로 선동을 일삼았던 유튜버가 제기한 성접대 의혹으로 당원권 정지 6개월이라는 당 윤리위의 중징계를 받았다. ‘개딸’로 불리는 이재명 민주당 의원의 일부 강성 지지자들은 박지현 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태어날 때부터 봐온 교회에서 기저귀도 갈아주던” 아이에게 과자를 입으로 전해주는 과거 영상을 공유하며 “아동 성추행”이라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가짜뉴스는 프레임 전쟁과 동전의 앞뒷면처럼 얽혀 있다. 해방 정국에서 가짜뉴스는 좌우의 극단적 대립을 촉발했다. 해방 후 열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외부에 공개되기 직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945년 12월 27일자 1면 머리기사로 회의 내용을 전한다. 소련은 조선의 신탁통치, 미국은 조선의 즉각적 독립을 주장했다는 내용이다. 실제 회의에서 미국은 30년 신탁통치를,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 가짜뉴스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미 ‘찬탁(신탁통치 찬성)=소련=좌익=반민족’과 ‘반탁=미국=민족=우익’이라는 프레임이 걸린 뒤였다. 요즘도 정치권에서는 때로는 자신의 치부를 뒤집기 위해, 때로는 ‘닥치고 공격’을 위해 상대에게 프레임을 건다.
장황하게 가짜뉴스 얘기를 늘어놓은 것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인 ‘신뢰’를 허무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진영 간 편 가르기, 분노와 혐오만 가득하다. 모두가 진실을 말할 능력을 잃고, 진실을 알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하게 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린 십계명 가운데 9번째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지상명령이다.
맹경환 뉴콘텐츠팀장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