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의 세포들은 자신의 역할에 진심이고 매 순간 진지하다. 패션 세포는 ‘룩’에 모든 열정을 쏟는다. 자린고비 세포에겐 수입과 지출 관리가 지상 최대의 과제다. 응큼이 세포는 유미가 데이트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 ‘기회’를 노린다. 게으름 세포마저 진심으로 게으르다.
티빙 오리지널 ‘유미의 세포들2’의 윤준상(48) 애니메이션 감독을 지난 18일 애니메이션 제작사 로커스의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윤 감독은 “세포들 각각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돼야 시청자들이 재미를 느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처음엔 우려도 컸다. 윤 감독은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의 감정을 연결한다는 건 분명 도전이었다.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이 될 거로 생각했다”며 “세포를 통해 주인공들의 심리묘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콘텐츠의 완성도와 시청자들의 감정이 달라질 거라고 봤다”고 돌이켰다.
그러면서 “드라마라는 큰 틀이 있었고 원작 웹툰이라는 또 하나의 틀이 있었다”며 “시각적인 면에서 아예 없던 걸 창조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수월한 부분도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웹툰 이미지는 아주 좋은 레퍼런스였다”고 말했다.
세포들의 상황을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선 움직임 조명 색감 등 많은 부분에서 디테일에 집중해야 했다. 유미가 슬프고 화가 나면 세포 마을엔 비가 오고 천둥이 치고 지진이 난다. 유미가 사랑에 빠지면 하늘이 분홍색으로 바뀐다.
유미와 웅이, 바비 세 주인공의 세포 마을 디자인에도 차별점을 뒀다. 그는 “유미 세포 마을의 디자인 모티브는 복고로 설정하고 따뜻한 색감과 턴테이블 같은 아날로그적 소품을 배치했다. 게임 개발자인 웅이의 세포 마을은 차가운 색을 쓰면서 현대적이고 공상과학(SF)적인 느낌이 나도록 했다”며 “완벽하고 판타지적인 면을 가진 바비의 내면세계는 입체적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은 데는 제작 방식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윤 감독은 “성우들이 먼저 목소리 연기를 녹음하면 애니메이터들이 그 감정을 듣고 캐릭터들의 연기를 만드는 선녹음 방식을 시도했다. 대부분 애니메이터에겐 스토리보드와 가이드녹음이 전달되는데, 가이드녹음은 전문 연기자가 하지 않으니까 심리 전달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성우들이 먼저 작업했기에 심리 묘사의 수준이 높았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연결성,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제작진에게 있었다”고 말했다.
시즌2에는 시즌1에 나오지 않은 새로운 세포들이 등장한다. 최근 화제가 된 건 유미가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등장한 욕 세포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있던 세포다.
윤 감독은 “욕을 차지게 하지만 외모는 상반된 캐릭터를 원했다. 출소하면서 간수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장면 등을 일부러 넣었다”며 “욕은 ‘삐’ 처리될 거로 생각했는데 성우가 대사를 정말 맛깔나게 해서 ‘이건 살려야 웃기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공중파가 아닌 티빙에서 만드는 콘텐츠라 살릴 수 있었다”는 뒷이야기를 전했다.
윤 감독의 최애 세포는 불안이 세포다. 윤 감독은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숨어 있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불주둥이’라는 애칭이 있다”며 “반면 웅이 세포들은 주인을 닮아 다 짠하다. 웅이의 감성 세포는 ‘이불 킥’을 많이 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작업 과정이 재밌으면서도 어려웠던 캐릭터는 유미가 책을 내는 출판사의 편집장인 안대용 세포다. 대학 시절부터 유미를 짝사랑했지만, 이루지 못한 인물이다. 안대용 세포 마을엔 웹툰에 나오지 않는 유미 동상이 서 있다. 유미를 포기하고 동상이 무너지면서 안대용의 사랑 세포가 석양 속으로 걸어가는 장면을 만들었다.
그는 “정말 너무나 진지한 ‘병맛’ 코드를 넣었다. ‘드래곤볼’ 같은 소년 만화와 1970~80년대 홍콩 느와르 감성을 동시에 담았다”며 “모티브와 이미지를 원작에서 가져오되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면 뭐하러 영상화를 하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안대용 세포가 공개된 후 ‘돌았다’는 시청자 반응을 확인했을 때, 의도가 제대로 전달됐음을 깨달았다. 윤 감독은 “처음 의도대로 만들었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많이 순화했다. 그래도 안대용 세포를 원작의 이동건 작가가 마음에 들어 했다는 얘기에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윤 감독은 매회 뮤지컬, 재난, SF, 괴수, 공포, 다크히어로, 좀비, 치정막장 등 다양한 장르를 녹였다. 그는 “6화에선 ‘세상에 다시 없는 베드신’을 만들고자 했다. 유미의 손 세포가 바비의 엉덩이를 상징하는 ‘H2 행성’에 착륙해 깃발을 꽂자 관제실에 있던 모든 세포가 환호하는 장면”이라며 “누가 그렇게 베드신을 만들겠나. 주인공들의 키스 장면을 두 사람의 혀 세포가 탱고 추는 장면으로 표현한다든지 상상력을 발휘할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가장 만족스럽게 나온 장면은 시즌2 첫 화에서 웅이와 이별한 유미가 힘든 시간을 이겨내는 부분이다. 윤 감독은 유미의 감정 변화를 세포들의 이별 극복 항해로 표현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세포들은 놀이공원 바이킹을 타듯 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파도에 휩쓸려 다닌다. 결국 하늘도 파도도 잠잠해지고 지친 세포들을 실은 배는 고요한 바다를 항해한다. 윤 감독은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조용히 바다에 비치는 장면을 꼭 만들고 싶었다. 그 신이 좋다”고 여러 번 말했다.
시즌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장면은 바비와 헤어진 뒤 ‘프라임 세포’ 자리에 있던 유미의 사랑 세포가 실각하는 부분이다. 바비에게 배신당한 사랑 세포는 뿔이 나고 해골이 달린, 불을 뿜는 분노의 화신으로 변한다. 유미는 세포 마을에 등장해 사랑이를 쓰다듬으며 “그동안 수고했다. 괜찮다”며 이제 그만 쉬라고 말한다. 유미가 작가로서 방향을 잡고 성장하는 터닝포인트다. 기술적으로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연결되는 게 아니라 합쳐지는 장면이었다.
윤 감독은 “유미보다 사랑이의 감정에 중점을 두고 쓸쓸함을 잘 표현하고 싶었다. 클로즈업 샷에서 사랑이의 눈에 눈물이 고여 떨어지는 타이밍, 그러다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 등 여러 디테일에 신경 썼는데 그 장면에서 제가 너무 슬펐다”며 “최대한 감정선이 끊기지 않게 작업팀에서 묘사하도록 고민했다. 유미와 사랑이의 시선을 맞추는 데 품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윤 감독은 이번 작업의 공을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돌렸다. 윤 감독은 “‘극장판 애니메이션 런닝맨’ ‘레드슈즈’ 등을 제작한 디자인팀이 중요하고 어려운 작업을 맡아 풍성한 화면을 만들었다”며 “그간 쌓인 노하우로 장인정신을 가진 아티스트들과 함께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총 250분 분량의 작업에 로커스 소속 아티스트 90명 중 70여명이 투입됐다.
많은 시도가 가능했던 건 윤 감독의 화려한 경력 덕분이다. 그는 20여년간 애니메이션과 ‘블레이드 앤 소울2’ ‘검은 사막’ 등 게임의 시네마틱(세계관을 보여주는 영상),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 멀티미디어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업했다.
‘유미의 세포들2’가 애니메이션을 성인도 즐길 수 있는 장르로 인식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게 가장 큰 성과라고 그는 말했다. 윤 감독은 “드라마에 애니메이션을 접목한다고 했을 때 ‘이상할 것 같은데’ ‘유치할 것 같은데’ 등의 반응이 있었지만 재미를 느끼는 시청자들이 많아졌다”며 “애니메이션은 아동용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 이 작품을 계기로 성인도 공감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 환경이 국내에 조성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