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살림을 망쳐 놓고 야반도주한 스리랑카 대통령의 뉴스를 접하다가 교회의 존재를 발견했다. 불교세가 강한 이 나라에서 기독교(가톨릭 포함) 비율은 7% 정도다. 개신교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1% 정도로 미미하다. 주로 성공회와 감리교, 침례교, 구세군 같은 교단들이다.
이들 교회는 수년에 걸친 고타바야 라자팍사 전 대통령 일가의 실정을 목도하면서 타 종교인들과 손을 잡았다. 이어 성공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기도 모임을 갖거나 침묵시위를 조직하는가 하면 종교 간 포럼도 열었다. 크리스천 출신의 정치인과 언론인은 관리들의 부패상을 고발하고 부실한 정부 정책에 날선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활동이 라자팍사 일가 퇴진에 주요 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한 손으로 정의를 외쳤다면 다른 손으로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데 힘을 쏟았다. 스리랑카는 수년에 걸친 경제 불황으로 양극화가 극심했다. 크리스천 가정과 교회들은 끼니를 거르는 주민들에게 점심을 나눠주고, 식료품 키트 등을 보급했다고 외신은 보도했다.
이 같은 교회 활동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건 3년 전 발생한 사건 때문이다. ‘스리랑카의 부활절 악몽’으로도 유명한데, 2019년 부활절에 최대 도시 콜롬보 등의 교회 3곳과 호텔 등에 연쇄 폭발 테러가 발생해 200여명이 숨졌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의 공격 때문이었다. 이런 핍박과 고난을 겪고도 스리랑카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본연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교회 풍경도 있다. 기독교가 먼저 들어온 북미나 유럽 교회 사이에선 갈등과 분열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동성애 이슈로 교단이 쪼개지고 교회가 갈라서고 있다. 유명 목회자 중엔 돈과 여성 문제 같은 추문에 휩싸인 경우도 적지 않다. 1% 안팎의 교세 속에서 신앙의 자유에 목말라하는 스리랑카 교회와 비교하면 선진국 교회에선 넘치는 자유를 주체하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모습이다.
한국교회는 어디쯤 와 있을까. 일제 강점기 시대와 6·25전쟁을 겪었던 고난의 역사는 작금의 스리랑카 교회가 마주한 현실과도 겹친다. 초고속 성장과 부흥을 맛본 뒤에는 풍요로움 속에서 서구 교회가 겪고 있는 명암도 교차한다. 선교사 파송 세계 2위의 나라로 우뚝 서고, 안팎으로 착한 교회의 모습도 보였지만 각종 조사에선 인기 없는 종교로 꼽히는 현실은 안타깝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가 맞닥뜨린 팬데믹 이후는 위기이면서 기회다. 가장 큰 위기는 이단·사이비들의 발호다. 진짜가 강하면 가짜는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게 이치인데 지금은 그 반대다. 진짜가 약한 것 같으니 가짜가 여기저기 판을 친다. 신천지 집단이 대표적이다. 주요 언론마다 대문짝만한 광고를 게재하면서 이미지를 세탁하고 있다. 유튜브를 비롯한 SNS에서는 주요 이단 집단들이 교묘한 방식으로 뭇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있다.
반면 포스트 팬데믹은 한국교회를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기회이기도 하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교회마다 코로나19 이전으로의 원상회복을 목표로 각개약진을 하고 있다. ‘우리 교회부터 살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 이름으로 한목소리를 내고 일치된 힘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이단·사이비에 대한 대응이 그렇고, 사회 이슈 대책도 마찬가지다. 차별금지법과 사립학교법, 인구 감소 같은 사회·문화적 도전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안티 기독교 세력의 공격도 만만치 않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 가치를 수호하고 교회를 보호하는 일은 한두 교회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울러 한국교회의 공교회성 회복에도 호기가 될 수 있다. 교회 밖 마을과 주민 곁으로 더 깊숙이 다가가면 좋겠다.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일은 교회의 주특기다. 1%밖에 안되는 스리랑카 교회의 사회정의 활동이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사랑의 그릇에 정의를 담았기 때문이다.
박재찬 종교부 차장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