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 독특한 책을 손에 잡았다. 103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고독이라는 병’이다. 이 책은 1960년 동양 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왔다. 김 교수가 불혹의 나이에 저술한 수필집이다.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당시로선 드물게 60만부가 팔린 대형 베스트셀러다. 6·25전쟁으로 지독한 상실감을 겪던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했기 때문이다.
60년 전 60만부가 팔린 책은 그동안 절판돼 구할 수 없었는데 최근 두란노서원의 임프린트 ‘비전과 리더십’이 복간했다. 글의 시점은 1960년 그대로 두었고, 맞춤법만 다듬었다. 일단 책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서지사항을 가리면 요즘 나온 책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세련됐다. 원고를 다듬은 편집자도 “책이 늙지 않았다”며 기이해 했다.
60년 전 서울 신촌의 봉원사 부근에는 화장터가 있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시신을 태우는 화장터 연기를 뒤로하고 그는 연세대 뒷산 중턱을 끼고 도는 산길을 걷는다. 혼자 걷는 산길은 끝없이 고요하며 산책의 종점에 다다르면 나무가 없는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빈 마음에 빈 하늘을 담는 일, 하늘과 구름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을 반복한다. 책은 인생과 마음과 가치와 지혜와 고향을 하나씩 곱씹은 뒤 현대인에게 찾아오는 고독이라는 병을 마주한다. 이어 절대자의 사랑이 바로 이 고독을 치유한다고 강조한다.
책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선생은 늙지 않아야 한다’는 대목이다. 당시 김 교수는 교육자로서 비교적 조용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30~40대의 젊은 선생들이 생동감을 잃거나 떠들고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참을 수 없다고 하는 발언을 듣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늙은 마음으로 자기의 기분만 고집하는 태도가 자신을 교육계에서 버림받게 하고 서글픈 운명으로 몰아가는 것을 그들은 알까.”
늙은 마음으로 자기 기분만 고집하는 태도, 바로 ‘꼰대’다. 김 교수는 늙지 않기 위해선 새로운 연구를 거듭하며 무언가를 지속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다는 것, 그것이 안주이며 이게 사람을 늙게 만든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를 평생에 걸쳐 기억한 듯하다. 그는 1952년 전쟁 중 피난지 부산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교단 분열 실상을 목격했다. 그는 이후 극심한 좌절감 속에서 누가복음 9장 60절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말씀을 홀연히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때부터 2019년까지 무려 67년간 교회 밖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바이블 스터디 모임을 이끌었다.
이 스터디 모임을 기반으로 한 책이 ‘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두란노서원에서 출간했는데, 역시 1981년 주우 출판사에서 펴낸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를 복간한 것이다. 40년 전의 이 책도 서지사항을 모르면 나이를 눈치채기 어렵다. 책에서 김 교수는 어린이와 같은 삶을 꿈꾼다. 예수님이 어린이와 같은 삶을 살라고 가르쳤고, 사도 바울도 육신은 늙으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고 고백했음을 떠올린다.
김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이 철없고 어리석은 어린애 같은 저를’이라고 기도한다”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는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의 본질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주님을 위해 빈 지게를 메고 있는 지게꾼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이제 예수님 나이와 견줘 세배를 더 산 철학자는 지금도 “그리스도 앞에서 나는 내 목적이 없는 지게꾼”이라고 강조한다. 늙지 않는 김 교수와 그의 책을 통해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생각한다.
우성규 종교부 차장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