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환율이 달러당 1400원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해외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분이라면 밤잠을 설칠 것이고, 원자재를 수입하는 분이라면 아예 잠 못 이룰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환율 수준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와 비견될 정도이니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은행 부총재와 경제부총리 등 정책·통화 당국자들이 환율에 대한 경고성 발언을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예전에는 환율이 오르면 수출이 늘어 경제에 도움이 됐지만, 지금은 경쟁국 환율도 함께 올라 수출 증대 효과는 미미한 반면 수입 물가만 잔뜩 오르니 정책 당국의 속이 타들어 갈 만하다. 하지만 당국이 아무리 경고를 해도 환율은 계속 오른다. 아마도 작금의 환율은 투기적 요소보다는 외부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앞으로도 이런 고환율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최근 고환율 배경은 달러 강세
우리 환율이 상당 기간 높은 수준을 이어갈 것으로 보는 첫 번째 이유는 강달러 현상이다. 환율이라는 것이 다른 나라 돈으로 평가한 우리 돈의 가격이기 때문에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어도 비교 대상 국가의 경제 사정이 바뀐다면 얼마든지 변동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인데 세계 환율시장에서 미국 달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의 환율이 오르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세계 환율 변화의 근저에는 미국이 있다고 하겠다.
달러지수(dollar index·미국의 주요 교역 대상국 환율의 가중평균)는 작년 여름부터 오르기 시작했는데 8월 말 잭슨홀 미팅 이후로 오름세가 더욱 가팔라졌다. 알다시피 미국은 지금 인플레를 잡기 위해 강력한 긴축 정책을 펴고 있다. 금년에 이미 기준금리를 2.5% 포인트 인상했지만,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은 잭슨홀 미팅에서 인플레가 통제될 때까지 금리 인상을 계속할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금주에 연준이 기준금리를 또다시 0.75% 포인트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금리 인상을 계속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 국가는 이렇게 금리를 올릴 여력이 없다. 유럽은 지난 8일 기준금리를 0.75% 포인트 올렸지만 유동성 공급 확대 정책을 중단하지 않은 것만 보더라도 미국처럼 계속 금리를 올릴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우리 사정도 만만치 않다. 엄청난 가계부채가 금리 인상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세상의 돈은 자연히 고금리의 미국으로 몰리고, 달러 강세(타국 환율 상승)는 이어지는 것이다.
주변국 경제 상황도 우리 환율에 부정적
주변국의 취약한 경제 사정도 우리 환율에 불리하다. 중국은 엄격한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경제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그간 경제를 지탱해 왔던 부동산 경기마저 꺾이면서 금년도 경제성장률이 중국 당국의 목표치(5.5%)에 훨씬 못 미치는 3% 정도로 예상된다. 이에 중국인민은행은 금리를 인하했는데, 이로 인해 중국 위안화 환율은 2년 만에 다시 심리적 저지선이라는 달러당 7위안이 깨지기도 했다. 일본도 문제다. 일본은 금년 상반기 중 사상 최대 무역적자(약 8조엔)를 기록했다. 게다가 막대한 국가 부채로 제로 금리를 고수할 수밖에 없어 엔화 약세가 지속되고 있다. 지난주 엔화는 24년 만에 최고치인 달러당 144엔을 돌파하기도 했다.
우리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근 두 나라의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환율도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모양새다. 동아시아 경제가 활력을 보이기 전까지는 우리 환율의 방향 전환이 쉽지 않아 보인다.
무역수지 적자도 고환율 원인
우리 환율이 불안한 것은 어쩌면 우리나라의 수출 경쟁력 약화가 원인일지 모른다. 사실 이제까지 우리 환율이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것은 금리보다는 무역수지 흑자 덕택이었다. 그런데 대규모 흑자를 보이던 무역수지가 금년에 적자로 반전됐다. 8월까지 수출입 차이인 상품수지가 250억 달러 적자로 돌아섰다. 물론 원자재 가격이 폭등해 수입액이 크게 늘어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수출 증가세가 변변치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력 수출품인 정보기술(IT) 제품과 자동차, 선박 등의 수출 증가세가 주춤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수출이 여의치 못한 것이 세계적 경기 침체의 영향일 수는 있다. 그런데 만일 우리 수출품에 대한 수요 둔화가 구조적 원인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과거 1997년 외환위기도 반도체 가격 하락이 하나의 단초였음을 돌이켜본다면 최근 반도체 경기가 꺾였다는 뉴스를 그냥 흘려듣기 어렵다. 후발국은 추격해오고 우리 제품에 대한 수요 둔화는 장기화한다면 이는 당연히 환율에 반영될 것이다.
세계 구조 변화에 따른 환율전쟁
이렇게 볼 때 최근 환율 상승은 일시적 움직임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특히나 세계는 지금 물건을 싸게 만들기 위해 하나가 됐던 글로벌화가 퇴조(de-globalization)하고 있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물건값이 오르는 인플레를 피할 수 없고, 각국이 협력하기보다는 자국 이익에만 골몰하게 된다.
최근 미국의 금융·산업 정책이 그 좋은 예가 되겠다. 미국은 자신의 인플레를 잡기 위해 다른 나라에 대한 영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금리를 무자비하게 올리고, 그로 인한 환율 강세의 부정적 효과(무역 적자, 실업 증가)는 자국 생산제품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세계 최강 미국이 그러할진대 다른 나라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정책들은 결국 환율전쟁(환율 절상 경쟁)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 경쟁을 버텨나갈 기초 체력이 충분치 않은 국가에서는 환율 상승이 불가피하다.
만일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이라면 외화를 조금씩 분할 매수해 경비를 마련할 것을 권해드린다. 환율이 예전 수준으로 돌아오길 기다린다면 상당 기간 여행을 못 갈 수도 있다.
한국은행 자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