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바리스타 대회는 양궁과 비슷해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국가대표되는 게 어렵다고 하잖아요. 한국은 따뜻한 라테를 잘 먹지 않는 나라인데도 라테아트 선수층이 두터워요. 해외에선 국가대표가 되면 2, 3년씩 대회에 나오는데, 한국은 국가대표 1명 뽑는데 많게는 60명, 못해도 30~40명과 경쟁하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세계대회에 나가서는 무대를 즐길 수 있는 거죠.”(올해 월드 라테아트 챔피언십 준우승을 차지한 이영화 바리스타). 한국은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나라다. 그런데 호주 미국 중국 대만 등 따뜻한 라테를 즐기는 나라들을 제치고, 한국인이 라테아트 바리스타 챔피언을 차지했다. 바리스타라는 직업의 세계는 어떨까. 지난 21일 서울 송파구 커피 크리에이티브 컴퍼니 로앤엄에서 월드 라테아트 챔피언에 오른 최초의 커플 엄성진(엄폴), 이영화(로라) 바리스타를 만났다.
이 바리스타는 남자선수 위주였던 커피업계에 등장한 첫 여성 국가대표다. 그동안 세계대회에서 연달아 떨어지면서 ‘추풍낙엽팀’으로 불렸지만, 올해 세계 라테아트 챔피언십에 출전해 준우승을 거뒀다. 그의 연인이자 코치인 엄 바리스타는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하고 있는 라테아티스트다. 2016년 한국 커피업계 최초로 월드 라테아트 챔피언십 1등 트로피를 차지했었다. 도쿄 커피 테스트 1위, 밀라노 라테아트 챌린지 1위 등을 기록하며 세계 최초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기도 했다.
“처음 일본대회에 나갔을 때 우승할 것이라고 누구도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당시 세계대회에서 외국인, 특히 동양인에게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 오해가 있었어요. 그래도 ‘내가 잘하면 주겠지’라는 생각으로 하니까 우승하더라고요. 다음 대회에 후배들이 어마어마하게 신청했어요. 후배 바리스타들에게 ‘어, 이게 되네’라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은 거죠.”(엄 바리스타)
25살이 되기 전까지 커피, 콜라 같은 ‘까만 음료’는 먹지 않았던 엄 바리스타가 커피에 발을 들인 건 2005년 1월이다. 바리스타 열풍을 일으켰던 드라마 ‘커피프린스(2007년)’가 방영되기도 전이다. 엄 바리스타는 “그때는 카페가 아니라 다방이었다. 카페 가는 사람을 ‘된장’이라 부르고, 남자 혼자 카페에 가면 이상하게 쳐다보던 시절이었다”면서 “바리스타가 되고 싶어도 보고 배울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고 했다. 이제는 바리스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18년간 쌓인 엄 바리스타의 자료부터 찾는다.
라테아트 바리스타에게는 젖소가 연습량을 계산하는 단위로 통한다. ‘반 마리 잡았다’ ‘소꼬리도 못 잡았다’는 식이다. 엄 바리스타가 18년간 잡은 젖소는 5마리가 넘는다. 라테아트 연습을 하다보면 그림을 그리기도 전에 싱크대에 버리는 일이 흔하다. 이들에게 한 팩에 1300원 하는 우유를 찾아 돌아다니는 건 일상이다. 이 바리스타가 세계 라테아트 챔피언십을 준비하는 두 달여간 사용한 우유값은 500만원에 이른다. 평소에는 하루 평균 50잔, 대회 준비 기간에는 수백잔까지도 커피를 만든다.
이 바리스타는 “한국에서 라테아트 바리스타는 ‘우유 많이 쓰는 애’라는 인식에 카페 사장님들이 싫어한다. 이 행위가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카페라테를 밥처럼 먹는 호주에서는 라테아트를 못하면 바리스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카페라테를 잘해야 커피 전문가로 대우한다. 하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위주인 한국에서는 라테아트를 배우는 것조차 쉽지 않다. 자격증 학원을 다녀야만 비로소 따뜻한 라테를 만들 기회가 생긴다.
“‘라테를 먹으면 속이 안 좋다’라는 인식이 깨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우유 때문이 아니거든요. 우유에는 비린내가 없어요. 커피가 비려지는 건 커피 추출이 잘못된 경우가 대다수예요. 먹기 편하고 실패가 없는 아메리카노를 많이 찾는데, 라테가 맛있다는 걸 알려줄 기회만 있다면 한국에서도 바리스타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엄 바리스타)
이들은 ‘한국의 커피’를 만드는 게 목표다. 한국의 바리스타 문화는 2세대를 거쳐가는 시점이다. 외국은 이미 3세대가 지났다. 엄 바리스타는 “온 가족이 밥을 먹고 카페를 가는 하나의 ‘문화’까지는 들어왔다. 하지만 떡볶이, 김밥처럼 ‘삶’의 일부로 자리잡지 못했다. 한국은 카페도, 바리스타도, 자격증 학원도 제일 많은데 정작 한국의 커피가 없다. 떡볶이를 먹을 때 ‘우리 엄마가 더 맛있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기준점이 될 수 있는 한국의 커피 레시피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커피의 맛부터 라떼아트 디자인까지 트렌드 변화가 전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빨라요. 빨리 익숙해져 버리는 거죠. 커피 맛도 사람들이 처음에 신기하게 여기다가 여기저기 비슷한 맛의 커피를 하니까 질릴 수밖에 없어요. 점점 더 빨리, 더 자극적인 걸 찾게 되면서 깊이가 사라져가는 것 같아요. 바리스타가 화려한 걸 안 하면 뒤처진다는 느낌을 받지만 트렌드만 쫓다보면 흥미도 빨리 잃게 돼요.” (이 바리스타)
엄 바리스타는 바리스타를 꿈꾸는 이들에게 ‘멋있는 커피’를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는 “첫 가게는 손님들이 뭘 좋아할까를 생각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잘 됐다. 규모를 10배로 키웠던 두 번째 가게는 잘되지 않았다”면서 “당시에는 트렌드가 바뀌면서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커피만 해서 잘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걸 준비해야지 멋있는 걸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신영 기자 spiri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