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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말꼬리 잡기



‘질차(叱嗟)’의 사전적 정의는 ‘잘못을 나무람’이다. 고문헌에서는 짜증과 분노가 섞인 감탄사나 욕설로 쓰이곤 한다. 우리말로는 ‘쯧쯧’ ‘제길’ ‘젠장’ 정도가 적당하겠다. 요즘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자주 내뱉는 더욱 적합한 번역어가 있기는 하지만, 성적 의미를 담은 비속어라 차마 여기에 쓸 수는 없다.

최초의 용례는 ‘사기’의 ‘노중련열전’에 보인다. 주나라 열왕이 죽자 사방의 제후들이 조문 사절을 보냈는데, 제나라 위왕만 보내지 않았다. 열왕의 후계자 현왕이 사신을 보내 무례를 꾸짖었다. 위왕이 말했다. “쯧쯧(叱嗟), 여종의 자식 주제에.” 미천한 여인의 소생이었던 현왕에게 모욕과 멸시를 듬뿍 안겨주는 발언이었다.

1736년 사헌부 지평 이관후가 영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표면적으로는 시국을 개탄하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정권을 잡은 노론 측 인사들을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노론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이관후 상소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비방하느라 ‘쯧쯧’ 혀 차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납니다”라는 구절을 문제 삼았다. 노론은 이관후가 의도적으로 이 구절을 인용해 영조를 모욕했다고 주장했다.

노론의 주장은 영조의 콤플렉스를 자극했다. 영조는 모친 숙빈 최씨의 미천한 신분을 늘 마음에 걸려 했기 때문이다. 노론의 의도는 적중했다. 아픈 곳을 찔린 영조는 길길이 날뛰며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상소를 올린 이관후는 유배되고, 상소 초안을 잡은 배윤명은 고문 끝에 죽었다.

노론 주장대로 이관후는 영조를 모욕하려는 의도로 ‘쯧쯧’을 상소문에 삽입했을까. 아무래도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영조실록’의 사관은 이관후 발언에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처벌은 지나치다고 평가했다. 더구나 이관후의 직책은 간언을 담당하는 대간이었다. 간언을 문제 삼아 대간을 처벌한다면 누가 바른 말을 하겠는가.

영조의 과민 반응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지만 국왕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이후로는 아무도 영조 앞에서 ‘쯧쯧’이나 ‘여종’ 따위의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영조 앞에서 책을 읽을 때는 행여 문제가 생길까 싶어 모든 내용을 사전 점검했다. 사도세자는 ‘한서’에 나오는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채찍질이나 면하면 족하다”라는 구절을 “노비는 살면서 채찍질이나 면하면 족하다”라고 고쳤다. ‘노비의 자식’이 영조의 콤플렉스를 자극할까 두려워서다.

영조의 콤플렉스는 늙어서도 여전했다. 여든 살 무렵, 영조는 자리에 누운 채 신하들에게 ‘사기’를 읽게 하고 잠을 청했다. 한창 책을 읽어내려가던 신하가 문제의 구절을 읽었다. “쯧쯧, 여종의 자식 주제에.” 코를 골며 자던 영조가 벌떡 일어나 땅바닥을 치며 소리쳤다. “내 앞에서 이 부분을 읽다니, 읽은 놈이 누구냐?” 신하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세손이었던 정조가 재치를 발휘했다. “제가 계속 여기 있었지만 그 부분을 읽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직 거기까지 읽지 않았습니다.” 눈치를 살피던 신하들도 세손의 말에 동조했다. 세손과 신하들이 합심해 오리발을 내밀자 영조도 할 말이 없었다. 영조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신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 지루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발언을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자리에서 저지른 아마추어적 실수를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건 정당한 비판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발끈 성내며 언론사를 고발해봤자 논란을 부채질할 뿐이다. 원만하게 해결할 방법이 있을 텐데, 어느 쪽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정치는 지켜보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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