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도 없는 방에서 한 달을 갇혀 사는 대신 1000만원을 받기로 한 남자. 이 남자는 과연 한 달을 채울 수 있을까. 만약에 내 일상이 24시간 방송으로 송출돼 전 국민이 본다면 어떻게 될까.
유튜브 크리에이터 진용진의 ‘없는 영화’ 시리즈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리뷰하듯이 보여주면서 내레이션을 입힌 이색적인 포맷의 콘텐츠다. 진용진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 편집 등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 이 시리즈는 단순히 재미만 있는 게 아니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현실 다큐멘터리처럼 풀어나간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각종 폭력, 인간관계의 양면성, 도박이나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사람들의 심리 등 사회적 이슈를 담는다. ‘없는 영화’의 일부 에피소드는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의 ‘커뮤니티 비프’에 초청되기도 했다.
이 시리즈는 진용진이 평소 영화 ‘덕후(마니아)’였기 때문에 탄생했다. 지난달 14일 서울 강남구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영화 리뷰를 하는 유튜버들이 부러웠다”고 연출 계기를 밝혔다. 그는 “‘없는 영화’는 20분 내외의 짧은 영상이다 보니 모든 서사나 결말을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진짜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영화 말미에 내레이션으로 풀어냈다”며 “마지막 멘트에 시간을 가장 많이 쓴다”고 덧붙였다.
에피소드 ‘치킨게임’에서 진용진은 양심과 직업윤리를 저버린 배달 근로자의 모습을 통해 “진입 장벽이 낮은 직업은 몇몇 사람이 업계를 망쳐가며 돈을 번다”고 비판했다. ‘용서’에서는 갑자기 사고로 죽은 주인공이 사후 세계에서 용서를 해야 하는 사람과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을 만난 상황을 설정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용서받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영화 한 편 한편마다 의도가 있죠. ‘인터넷 BJ’ 에피소드에서는 일부 남성이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면 이상형의 여자를 만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어요. ‘안전불감증’ 에피소드는 분노조절 장애 환자를 우리가 비웃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게 과연 괜찮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만들었어요.”
‘없는 영화’의 소재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술자리에서 나오는 고민에서 출발한다. 시청자들도 “보는 내내 공감했다”는 피드백을 줬다. 다소 냉혹하고 때론 잔인할지라도 결말은 항상 현실적이다. 방황하던 친구가 밝은 친구를 만나서 함께 위기를 극복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없는 영화’에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나쁜 친구나 연인 때문에 주인공도 함께 무너지는 서사를 통해 무겁지만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진용진은 “검은색을 하얀색으로 만드는 것보다 하얀색이 검게 물드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한다”며 “사람은 누군가로 인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도 누군가가 가진 검은색으로 인해 바뀔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현재 구독자 256만명을 보유하고 있다. 처음부터 인기가 많았던 건 아니었다. 2018년 11월만 해도 구독자는 1만명 남짓이었다. 2019년 8월 80만명, 2020년 4월 150만명, 같은 해 12월 200만명 등으로 급증했다. 이때 구독자를 견인한 건 ‘그것을 알려드림’이었다. 장기밀매 조직에 접근하거나 교통 체증이 생기는 원인을 알아보는 식으로 구독자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풀어주면서 인기를 얻었다.
진용진은 “당시 구독자가 엄청나게 가파르게 올랐다. 그러면서도 미래에 대해서 걱정이 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없는 영화’가 인기와 호평을 받는 최근에도 ‘소재가 떨어지면 어떡할까’라는 고민을 한다고 했다. “지금은 유튜브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유튜브도 더 이상 사람들이 안 볼 수 있잖아요. 그때 나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돼죠. 단순히 ‘유튜버 진용진’으로 살 수는 없겠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꿈은 연출자였다. 재밌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진용진은 “유튜버는 잠깐 머무는 직업이라고 하듯이 나도 다큐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얘기하고 다녔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없는 영화’는 그가 유튜버를 넘어 제작자로서 한 걸음 내딛게 된 계기가 됐다.
하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유튜브 콘텐츠이기 때문에 영화만큼 막대한 제작비를 쓸 수가 없었다. “가짜 피를 제대로 활용할 기술자가 없고, 경찰차를 못 구해서 경찰이 오는 장면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 아쉽죠. 유튜브에 머물면 장편을 준비하긴 어렵다고 생각해요. 몇몇 OTT에서 6~8부작 드라마 콘텐츠 제작 요청이 왔고, 시나리오를 준비하려고 논의 중이에요.”
그는 어린 시절 혼자 공상을 많이 하며 지냈다고 했다. ‘없는 영화’는 그의 상상을 영상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인생의 모든 선택지가 적혀진 답안지가 있다면 어떨지, 적화통일이 된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지 담아봤다. “중고등학생 땐 잡생각이 많고 멍하게 있어서 어리바리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때 생각했던 것들이 도움이 됐어요. ‘없는 영화’에 나오는 것도 있었고요. 그때는 ‘난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했는데 지금은 생각하는 게 직업이라서 그런지 그때 ‘연습’을 했다고 생각해요. 인생에 쓸데없는 건 없나 봐요.”
인간의 심리, 본능에 관해서 호기심도 많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학창 시절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갖가지 질문을 취조하듯 하게 된다고 했다. 진용진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겐 가장 흥미롭다”며 “‘부부수업 파뿌리’ ‘인간극장’과 같은 장르를 좋아한다”고 전했다. 그래서 인간 심리 서바이벌 ‘머니게임’, ‘피의게임’도 기획하게 됐다. 11월 11일에는 돈이 절실한 9명이 14일간 함께 생활하며 하루 한 번의 버튼 선택으로 서로를 배신하는 생존 배틀 ‘버튼게임’이 공개된다.
‘버튼게임’의 아이디어는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됐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기사님이 미터기 버튼을 안 누르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냥 내릴 때 돈을 더 냈어요. 그러면서 ‘버튼을 누르면 남의 돈이나 내 돈이 깎이는 게임을 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죠. ‘인간 실험을 해볼 수 있겠다’ 하면서요.”
최근 그가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지 물었다. “‘돈을 많이 줘도 되니까 영상 더 많이 만들어 달라’는 말을 들을 때 좋아요. 내가 만든 작품 보겠다고 할 때 가장 즐거워요.”
진용진은 그동안 ‘기존에 없던 걸 하고 싶다’고 밝혀왔다. 그의 콘텐츠는 기시감이 없다. 그는 “뭘 하더라도 신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공의 길이 뻔한 것만 하면서 먹고 살자는 마인드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장편 영화를 만들어 감독으로 데뷔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진용진은 “가능하면 빨리 상업영화를 해보고 싶다. 휴먼 스릴러 장르는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