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서점가에 소설 바람이 거세다. 김훈의 ‘하얼빈’,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등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중 ‘아버지의 해방일지’ 인기는 다소 이례적으로 보인다.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례식 이야기이고, 노인들 이야기이고, 전남 구례 이야기다. 이 소설이 출간 두 달도 안 돼 10만부 넘게 팔렸다.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왔다는 정지아(57) 작가를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만났다.
“40대, 50대 남성 독자들이 많은데, 그 분들이 386세대이다. 대부분 생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고, 나이가 있으니 제법 높은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 분들이 제 소설을 읽고 있다는 건 지금도 청춘의 가슴 뜨겁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싶어서 새롭게 느껴졌다.”
“또 제 글이 그동안 20대 여성들한테 안 읽혔다. 낡고 재미없다는 평가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20대 여성들도 많이 읽는 거 같아서 좀 뿌듯했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는 평이 제일 많다. 욕만 했던 아버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말수가 없어서 잘 몰랐던 아버지에게도 뭔가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됐다, 그런 평도 봤다.”
정지아는 자신의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현실을 낯설어하면서 그 이유를 분석하는 중이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이태의 ‘남부군’ 등 이른바 ‘빨치산 소설’이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19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2020년대에 빨치산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고 누가 생각했을까.
정지아는 몇 가지 분석을 내놓았다. “왜 팔리는지 저도 궁금해서 물어보면, 일단 웃기잖아, 그런 얘기를 많이 한다.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썼다는 거, 그게 일번인 거 같다. 그 다음은 우리 사회가 이데올로기 가지고 진보 보수가 싸우는데 그런 갈등을 녹여내고 있다는 것. 소설 안에서는 진보 보수가 화해한다. 그게 독자들에게 후련함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무겁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게 전개한다는 게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정지아는 “진지해지지 않게”를 되뇌며 “가벼워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늘 비장하게 살아왔다. 빨치산의 딸이었으니 왜 안 그랬겠나. 글도 느슨한 걸 용서하지 못했다. 진지하고 숭고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그것이 누군가를 숨막히게 하는구나, 불편하게 하고 긴장시키는구나, 그런 걸 알게 됐다.”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발견되는 데는 출간 초기 유시민 작가의 추천이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있다. 인터뷰가 있기 이틀 전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페이스북을 통해 이 책을 추천했다. 정지아는 “두 분의 추천은 로또와 같은 행운이었다”면서 “특히 문 전 대통령은 ‘김일성주의자’라고 공격 당하는 마당에 제 책을 추천해서 좀 놀랐다. 빨갱이를 미화하는 글이었다면 그 분이 추천했을까 싶다”고 말했다.
젊은 독자들에게 이 소설이 아버지에 대한 소설로 읽힌다는 것도 흥미롭다. 정지아는 “20대는 이데올로기에 아무 관심이 없다”면서 “아버지라는 캐릭터가 사회주의자이고 진보인가 본데, 우리 사회 꼰대들과는 좀 다르더라. 그게 20대 여성들에게 흥미로운 것 같다. 역사성을 지우고 캐릭터로만 본다는 게 사실 저도 납득은 잘 안 가지만”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소설 속 ‘고상욱’이라는 인물은 우리가 전에 본 적 없는 캐릭터이긴 하다. 빨치산 출신의 늙은 사회주의자인데, 빨치산이나 사회주의자라면 흔히 비장하게 묘사되기 마련이지만 이 소설은 그를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 쓸데없이 진지해서 오히려 코믹한 인물, 온갖 득 없는 일에 끼어드는 오지랖 넓은 사람으로 그려낸다.
정지아는 “빨갱이가 실제 적이었을 때는 유머가 될 수 없다”면서 “그런데 지금은 사회주의가 망하고 없는데 빨갱이 타령이 무슨 소용인가. 더구나 시골 노인이 된 빨갱이들한테 뭔 힘이 있나. 그러니 빨갱이를 웃기게 바라볼 수도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정지아가 자신의 아버지를 실제 모델로 해서 창조해낸 고상욱이란 캐릭터는 우리 문학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조금도 위험하지 않은 사회주의자’ ‘유머로 코드화된 빨갱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정지아의 아버지 정운창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어머니 이옥남은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나는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았다. 사람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 시절에는 그 대안이 사회주의였을 뿐이다’라고. 그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생각은 변해왔지만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빨치산이었던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 그게 우스꽝스러웠다. 힘도 없는 자들이 쓸데 없이 비장한 것, 저런 노인을 적이라고 하며 경계하는 것, 그게 쓸쓸하기도 하고 웃기기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은 고상욱의 장례식 3일을 다룬다. 문상하러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빨치산 고상욱’에 가려진 ‘구례 사람 고상욱’을 보여주면서 이념의 관념성과 무의미함, 그리고 이념이라는 잣대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아버지는 19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빨치산이라는 말은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4년뿐이었다. 그 4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정지아는 1990년 아버지 이야기를 쓴 실록 ‘빨치산의 딸’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 책은 출판금지 처분을 받았고,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돼 집행유예를 받았다. 30년이 더 지나 이 실록을 바탕으로 자신의 첫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 소설로 난생 처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그동안 세상이 변한 것일까.
“사회 전체적으로는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 상당히 너그러워졌다고 생각한다. 빨갱이 타령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례는 아버지가 살아온 동네였다. 맨날 서로 부대끼고 사는 생활공간에서는 이데올로기가 큰 문제가 안 된다. 좌우 대립은 관념적으로 부딪히니까 더 세지는 것 같다. 제 소설을 보고 태극기부대 어르신들에 대해서도 그 사연이 궁금해졌다는 반응도 있다.”
부친은 2008년 사망했다. 서울에 살던 정지아는 2011년부터 노모를 모시기 위해 구례 고향집으로 내려와 지내고 있다. 그는 “어쩔 수 없어서 귀향했지만 구례로 가길 정말 잘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살 때는 자꾸 새로운 것을 봐야 한다는 강박감, 안 그러면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있었다. 시골에서는 마음을 비우게 된다. 서울과의 물리적 거리가 있고, 어떤 흐름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고, 멀찍이서 볼 수 있게 된다. 특히 인간관계가 달라지고 풍성해지면서 인간을 다른 각도로, 다층적으로 보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됐다. 서울에서는 못 느껴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유대감이 생겨나니까 지금 이대로 살아도 괜찮지 뭐, 그런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정지아가 지방에서 쓴 소설이다. 등장인물도 대부분 구례 사람들이고, 대사는 거의 다 전라도 사투리로 쓰였다. 정지아는 “사투리 때문에 어렵다는 쪽보다 더 좋다는 반응이 많은 것 같다”며 “생활의 생생함을 전달할 필요가 있어서 이전의 몇몇 단편에서도 사투리를 구사했다”고 얘기했다.
정지아는 다작하는 작가는 아니다. ‘빨치산의 딸’과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제외하면 네 권의 소설집을 냈을 뿐이다. 지난해 출간한 소설집 ‘자본주의의 적’은 8년 만의 신작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단편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와 ‘검은 방’은 각각 2020년 김유정문학상과 심훈문학상 수상작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올해 제39회 요산김정한문학상을 받았다.
정지아는 “가까이서 본 것 외에는 못 쓰는 멍청이인데, 제가 잘 알고 봐온 게 부모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써왔다”면서 “앞으로 장편을 더 쓰려고 한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