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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신의 영역, 인간의 영역



“왜 모든 일은 불시에 일어날까? 걔가 내 손을 잡을 줄 미리 알았더라면 그 순간을 더 오래 기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텐데.”(정해나 ‘요나단의 목소리’에서)

책을 읽다 문장이 좋아 밑줄 긋고 SNS에도 올렸다. 포근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TV 화면에 속보가 떴다. ‘이태원, 사고 발생.’ 처음엔 사망자가 열 명인가 그랬던 것 같다. 이윽고 100여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막이 잘못된 줄 알았다. 부상자를 사망자로 잘못 쓴 거겠지. 실수로 동그라미 하나 더 붙은 건 아닐까. 아니었다. 혼란스러웠다. 정말 우리나라 뉴스 맞을까. 신문 국제면에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코너에나 등장하던 소식인데.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어지러웠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끔찍한 표현이지만 집을 나설 때 ‘오늘 죽을 수도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가족을 배웅하며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수도 있겠다’ 예감하는 사람 또한 드물다. 그들도 그런 숱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으리라. 우리는 그저 평소처럼 집을 나서고 평소처럼 손을 흔든다. 돌아올 것이라, 다시 만날 것이라, 당연히 믿는다. 그런 건 강한 믿음의 영역도 아니고 평범한 일상의 흐름 정도다. 우리는 그것을 정상(正常)이라 말한다. 정상이 흔들리고 위협받는다 느낄 때 더욱 공포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무력감 앞에 인간이란 사실을 각성한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불시에 일어난다. 많은 일은 예고 없이 일어나고, 신은 우리에게 미래를 그려 보여주지 않는다. 시간을 바꾸라고 명령하지도 않는다. 벌어진 일을 뒤집는 것은 신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일 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예비하라.” 어쩌면 당연한 숙제를 신은 인간에게 넘긴다. 그런 숙제마저 제대로 못 해 실수하고 또 실수하는 것이 우둔한 인간이 갖는 한계이며, 한계를 인식하며 한 걸음씩 다듬어나가는 것 또한 인간된 겸허다.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156명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거냐고 되묻는 사람마저 있었다. 속뜻이 무엇인지는 안다. 세상엔 안타까운 죽음이 많고, 1명의 죽음이나 100명의 죽음이나 다르지 않으며, 죽음의 누계를 따지면 우리는 숱한 죽음 속에 사는 것이니, 운명이라 여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게다가 당시는 정상을 벗어난 통제 범위 안에 있었노라고. 하지만 한날한시에, 한 자리에서, 그 숱한 사람이 죽은 것을 그저 ‘어쩔 수 없던 일’이라 여길 수 있을까.

거칠게 책임만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를 끌어내려 울분을 풀자는 뜻도 아니다. 어쨌든 그런 참사가 일어났으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방책을 세우는 것 또한 인간의 영역일지니, 최소한 인간이 할 일은 하자는 뜻이다.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진다면 각자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함으로써 비극은 점차 줄어들 것이며, 마땅히 할 일을 했는데도 하릴없이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가늠하는 논의 또한 마땅하다. 이런 모든 것을 우리는 ‘사회적 위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멀게는 서해 훼리호로부터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이천 냉동창고, 천안함, 세월호, 제천 스포츠센터 그리고 이번 이태원 참사까지 우리는 너무 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살아왔다. 지난 시대의 적폐라느니, 현 정권의 무능이라느니, 네 탓 남 탓 공방은 여전하다. 내 탓이란 사람은 여전히 없다. 우리가 겪는 모든 불행은 이런 ‘탓’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미래를 준비하는 것만이 미욱한 인간의 분명한 역할이며 또다시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면 미래의 역사에 우리는 모두 가해자일 따름이다. 평범한 우리는 오늘을 따뜻하게 살아가는 인사로써 슬픔을 위로하자.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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