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인은 잘 묻지 않는다. 교회에도 믿음과 순종에 대한 가르침은 많지만 물음을 권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일방적인 설교와 선포에는 익숙하면서도 궁금하거나 납득하기 힘든 문제에 대해 묻는 것은 뭔가 부적절한 일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사건을 오늘날까지 기념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루터는 교황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한다는 문서를 발행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지 물었다. 당시 교회는 그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는 대신 억압과 폭력을 택했고, 그 결과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종교개혁은 루터가 물음을 던져서가 아니라 교회가 물음을 금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물음은 사실 사랑이나 관심의 표현이다. 연인은 서로에게 늘 무엇인가 묻는다. 어떤 이론이나 사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물음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 물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두려워하고, 성경에 관심이 없거나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묻지 않으니 무지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읽고 외우지만 공부하지 않고, 신앙의 선배들이 2000년 동안 쌓아 온 신학적 통찰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설교자의 만담과 선동에 자신을 맡긴다. 성경을 읽다 혹 궁금한 점이 있어도 물으면 안 될 것 같아 조용히 속으로 앓다가 이단 종파가 나타나 이상한 답을 내어주면 금방 속아 넘어간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물음을 진지하게 다루고 신학적으로 건전한 답을 제공하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대신, 이단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며 문 앞에 이단 종파 ‘출입 금지’ 스티커를 붙여 놓는다. 이단을 피하려 부적을 사용하는 것인가.
물음은 상대가 있는 행위이므로,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묻지 않고 누군가의 권위에 전적으로 의존하면 자기 생각과 판단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자기 성찰이 없으니 주어진 정보에 대한 평가도 할 수 없다. 전광훈 같은 자가 나타나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성찰적 사유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 교회 안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묻지 않고 남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 신념화하는 사람은 그 신념을 공유하지 못하는 이들을 혐오하고 배척한다. 신앙이 깊고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이 정치적 견해 차이가 노출되면 돌연 무례하고 무정해지는 이유다. 이는 복음이 가르치는 오래 참음과 용서를 제대로 배우지도,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는 증거다.
묻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묻지 못하게 막는 것은 더 나쁘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라는 것은 묻지 말라는 말과 다르다. 하나님의 지혜를 믿는다면 답을 기대하며 물음을 던지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려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런데도 물음을 믿음이 약하거나 반항하는 태도로 보는 것은 필시 거기 답해야 할 지도자들이 게으르거나 무식하거나 폭압적이어서일 것이다.
물론 사람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있다. 그러나 그 신비가 빛을 발하는 것은 끈질긴 물음의 끝에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이다. 이 깨달음은 물음을 막고 참으며 억지로 얻어낸 믿음이나 순종과 달라서 갑질과 굴종, 혐오와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의 초(超)상식과 오늘 우리 교회의 아픔인 몰상식이 나뉜다. 상식을 뛰어넘는 사랑과 진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이 몰상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멸망을 향하는 극심한 타락의 시절에 교회가 다시 살아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으려면 물어야 한다.
손화철 한동대 글로벌리더십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