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권 뮤지컬 가운데 국제적 성공을 거둔 작품들은 대부분 극작가 미하엘 쿤체(79)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77)의 손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1992년 ‘엘리자벳’을 시작으로 ‘모차르트’ ‘레베카’ ‘마리 앙투아네트’ ‘댄스 오브 더 뱀파이어’ 등을 잇달아 히트시켰다. 특히 한국에서 2010년 ‘모차르트’를 시작으로 두 사람의 작품이 잇따라 공연되면서 영미권 뮤지컬 위주였던 한국 뮤지컬 시장의 판도도 바뀌었다. 동방신기 출신 김준수의 뮤지컬 데뷔작인 ‘모차르트’는 뮤지컬 한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을 대표하는 작사가이자 뮤지컬 대본 작가인 쿤체는 1970년대 친구인 헝가리 출신 작곡가 르베이와 함께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냈다. ‘플라이 로빈 플라이’의 경우 1975년 유럽을 넘어 미국 빌보트 차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이듬해 그래미상까지 받았다. 두 사람의 뮤지컬 입문은 쿤체가 독일어권 최대 뮤지컬 제작사인 오스트리아 비엔나극장협회에서 영미권 뮤지컬 20여편의 독일어 버전 제작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다.
뮤지컬 제작 노하우를 습득한 쿤체는 1990년대 들어 르베이와 함께 독일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1991년 쿤체의 역사 소설 ‘마녀’를 토대로 한 동명 뮤지컬을 처음 선보인 두 사람은 이듬해 뮤지컬 ‘엘리자벳’을 비엔나 무대에 올렸다. ‘시시’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 엘리자벳 황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이 작품은 독일어권 뮤지컬로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비엔나극장협회가 제작한 이 작품은 초연 이후 1996년 일본과 헝가리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상연되며 비엔나 뮤지컬 열풍을 일으켰다.
일본은 오스트리아 다음으로 ‘엘리자벳’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등 비엔나 뮤지컬의 세계화에 기여한 주역이라고 할 정도로 쿤체-르베이 콤비의 작품을 자주 선보였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이후엔 한국이 일본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두 콤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한국의 EMK컴퍼니는 기존 레퍼토리 공연만이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 개정판을 만들어 역수출하는가 하면 신작 ‘베토벤: Beethoven Secret’(이하 ‘베토벤’) 제작에 나섰다.
‘불멸의 연인’ 안토니 브렌타노 설정
내년 1월 12일부터 3월 26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세계 초연되는 ‘베토벤’은 클래식 음악 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꼽히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과 그의 ‘불멸의 연인’ 사이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실질적인 작업 기간만 7년, 첫 구상 단계부터 따지면 11년에 걸쳐 완성됐다. ‘베토벤’의 초연을 앞두고 내한한 쿤체-르베이 콤비로부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번 작품의 의미는 베토벤이 위대한 작곡가지만 그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베토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소재죠. 저는 청력을 잃어가는 위기 속에서 베토벤이 사랑 덕분에 새롭게 힘을 얻어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쿤체)
베토벤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끊임없이 연애를 했다. 10여명의 연애 대상 가운데 베토벤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누구였을까. 베토벤 사후 그의 비밀 서랍에서 발견된 연애편지에는 수신인의 이름이나 주소가 없으며, 날짜와 요일 그리고 K라고 쓰인 지명만 나온다. 그리고 구구절절한 내용 안에 상대를 ‘불멸의 연인’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쿤체는 불멸의 연인으로 후보들 가운데 베토벤의 절친이자 후원자였던 상인 프란츠 브렌타노의 아내 안토니 브렌타노를 낙점했다. 안토니는 베토벤의 친구였던 프란츠 브렌타노의 부인이었던 만큼 베토벤은 괴로워하다 자신의 사랑을 끝내는 길을 택했다. 안토니와 맺어지지 못한 이후 베토벤은 진지한 연애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베토벤의 ‘불멸을 연인’을 놓고 많은 논쟁이 있지만, 편지 작성 시기(1812년 추정)가 고증되면서 안토니 브렌타노가 유력한 후보로 추정됩니다. 저 역시 이 관점에 동의합니다. 게다가 대본가의 입장에서도 안토니가 아이까지 있는 유부녀라는 점이 드라마를 보다 극적으로 만들기에 좋았습니다. 윤리적 잣대가 높던 베토벤이 이런 관계에 얽히는 게 흥미로웠던 데다, 사랑을 통해 베토벤의 모습이 변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거든요.”(쿤체)
베토벤의 음악을 뮤지컬 노래에 사용
뮤지컬 ‘베토벤’이 독특한 점은 피아노 소나타 ‘비창’(8번)과 ‘월광(14번), 교향곡 5번 ‘운명’과 7번, 코리올란 서곡 등 베토벤의 음악을 뮤지컬 노래에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극에 등장하는 모든 노래는 현대적 정서에 맞게 편곡된 베토벤의 선율 위에 가사를 붙여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공연을 앞두고 공개된 넘버 ‘매직 문’과 ‘그녀를 떠나’는 각각 월광 소나타’와 코리올란 서곡을 변주한 것이다.
“‘불멸의 연인’에 대한 베토벤의 사랑은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베토벤이 음악에 자신의 영혼과 감정을 깊이 쏟아 넣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상처 입은 영혼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번 뮤지컬 작업을 위해 베토벤의 음악을 깊이 연구한 뒤 작품에 맞게 신중하게 골랐습니다. 그리고 작품에 맞게 편곡하면서 필요한 부분에는 추가로 멜로디를 작곡했습니다.”(르베이)
이번 작품을 통해 클래식 애호가들이 뮤지컬에 관심을 갖고, 뮤지컬 팬들에겐 클래식 음악을 친숙하게 만드는 것도 르베이의 목표다. 르베이는 “클래식과 현재의 음악을 연결해 단순한 뮤지컬 공연을 넘어 더 큰 하나의 문화적 확장을 시도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유럽이 아닌 한국에서 이번 작품이 처음 공개되는 것도 유럽에선 신화처럼 여겨지는 베토벤의 음악을 과감히 현대의 뮤지컬 무대로 가져오는 것과 연관이 있다. 쿤체는 “베토벤이라는 인물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나라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도해보고 싶었다”면서 “우리의 이전 작품들을 훌륭하게 만들어온 한국의 EMK가 이번에도 잘할 거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작품의 연출은 올여름 비엔나에서 열렸던 뮤지컬 ‘엘리자벳’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독일 연출가 길 메머트가 맡았고, 한국에서 ‘프랑켄슈타인’ ‘벤허’ 등 대형 창작 뮤지컬에서 견고한 연출력을 보여준 왕용범이 협력 연출가로 나선다. 그리고 뮤지컬 ‘웃는 남자’ ‘데스노트’ 등의 독창적 무대 디자인을 선보인 오필영 디자이너가 무대와 영상 디자인을 맡았다. 출연진으로는 베토벤 역에 박효신·박은태·카이, 안토니 역에 옥주현·조정은·윤공주가 맡는다. 이외에 이해준 윤소호 김진욱 박시원 김성민 전민지 최지혜 이정수 등이 출연한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