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여성 소설가 아니 에르노(82·Annie Ernaux)가 2016년에 발표한 소설이 소설가 백수린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여자아이 기억’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국내 출간된 아르노의 소설 중 최근작이다.
소설은 70대의 소설가 에르노가 열여덟 살 당시의 자신을 ‘여자아이’ ‘1958년 여자아이’ ‘아니 뒤센느(결혼 전 이름)’ ‘아니 D’ 등으로 호명하면서 그 소녀가 1958년 S라는 지역에서 열린 여름방학 캠프에서 경험한 일을 회고하는 형식이다.
이것은 에르노가 오랫동안 쓰지 못했던 이야기라고 한다. “언제나 일기 속 문장들엔 ‘S의 여자아이’나 ‘1958년 여자아이’에 대한 암시들이 있었다. 20년 동안, 나는 책을 쓰려는 내 계획 속에 ‘58’이라는 숫자를 적는다. 그건 여전히 쓰지 못한 책이다.”
에르노는 “그 여자아이를 잊고 싶었다”고 했다. “정말로 그녀를 잊기를, 그러니까 그녀에 대해서 더 이상 쓰고 싶은 욕구를 갖지 않기를.” 그것은 수치심에 대한 기억이었다.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는 수치심, 경멸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원했다는 수치심,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도 부적격한 사람이었다는 수치심.
노년에 든 에르노는 그 여자아이에 대해 쓰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악몽에서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는 나를 방해하고 붙잡는 것들을 치워버리기 위해 지금까지 써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2003년에 이 이야기를 쓰다가 50쪽쯤에서 멈춘 적도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나 2013년에 마침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1958년 여름으로부터 55년이 흘러서.
여름방학 캠프는 어머니의 과보호와 카톨릭계 여학교에서 성장한 식료품점 딸 아니 D가 처음으로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경험이었고 “파티를, 자유를, 남자의 육체를 발견했던 장소”였다. 에르노의 묘사에 따르면, 지도교사로 캠프에 참여했던 18세 여자아이는 타인들의 세계를 동경하고 사랑을 경험하기를 기다린다. 거기서 한 남자에 빠지고, 젊은 무리가 조성하는 자유와 쾌락의 분위기에 몸을 던진다.
이 기억은 에르노에게 수치스럽고, 무엇보다 설명되지 못한 것이었다. 에르노는 50년이 지나도 자기 안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마음을 와해시켜버리는 그 여자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그리고 마침내 심연 속의 그 여자아이를 구출해낸다. 그 여자아이가, 캠프에서의 그 밤이, 그 수치와 혼란, 열망이 자신을 글쓰기로 인도했음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사적인 경험에 기반한 글쓰기, 수치심이라는 주제 등 아르노 문학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70대의 저명한 여성 작가가 50년 전 남자와의 서툰 첫 경험을 쓴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작가가 청춘 시절의 이야기를 이토록 정확하고 아름답게 써낼 수 있다는 것도 놀랍다.
에르노는 소설 속에서 자신과 이 이야기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또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을 이토록 치열하게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지 거듭 질문한다. “나는 어떤 여자가 50년도 더 되었고 자신의 기억으로 뭔가 새로운 걸 덧칠할 수도 없는 오래된 장면들을 회상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다.”
에르노는 그러면서 “이 여자아이, 아니 D와 다른 누군가 사이에 적어도 단 한 방울이라도 닮은 구석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하고 싶다는 희망”을 언급한다. 에르노의 사적인 소설들에 노벨문학상을 수여한 이유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에르노가 그려낸 1958년의 여자아이는 에르노만의 기억이 아니다. 청춘을 통과해온 이들이라면 그 여자아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