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생활공동체를 세우고 7년이 지난 2007년 4월 마지막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새벽. 그저 죄송하다 말하는 짧은 전화를 받고 뛰쳐나간 대문 앞 굴비상자 안에 파랗게 식어가는 아이가 있었다.
다운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온유였다. 굴비상자는 고양이가 긁은 자국이 역력했다. 그 안에 저체온증으로 식어가던, 탯줄 끝에 집게가 달린 아이를 보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에 빠졌다.
굴비상자에 담긴 온유는, 살기 위해 내게 온 아이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줬다. 어떤 삶이기에 아이를 몰래 놓고 가는지 헤아릴 길은 없으나 적어도 교회 가까운 곳에 일부러 찾아와 아이를 놓고 가는 부모의 심정은 그나마 아이가 살고 누군가의 손에 따뜻하게 거두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리라. 그래도 어떤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아이를 굴비상자에 담아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언덕길을 오르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마땅한 다른 방법이 바로 찾아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8년 국민일보에 보도된 체코 베이비박스 기사가 내 눈에 번뜩였고 그걸 계기로 1년 뒤 2009년 12월 마침내 한국 최초의 베이비박스를 서울 관악구 난곡동 교회 담벼락에 만들었다.
난곡동 가파른 언덕길까지 올라와 베이비박스 문을 여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도무지 혼자 감당할 수 없을 숫자로 늘어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아이에 대한 간단한 출생정보와 함께 절박한 심정이 담긴 사연을 아이 품에 놓고 갔다.
혼외자, 강간, 근친, 경제적 상황…. 이들의 사연은 단순히 개인의 일탈이라고 치부할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도 없는 나는 가능한 베이비박스 문을 여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함께 울었다. 그게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명이었다.
들어줬다. 여기까지 무슨 사연이 있기에 와야만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내가 도울 수 있을지 말해줬다. 판단하지 않고 당신을 돕겠다. 필요하다면 아기를 돌보겠지만, 할 수 있으면 직접 키워보도록 말해줬다.
나눠줬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줬고 머물 곳이 필요하면 집을 빌려줬다. 필요한 재정은 언제나 빠듯했지만 하나님은 후원자를 통해 딱 그만큼을 채워주셨다.
지난해 여름 20대 초반 젊은 임산부가 베이비박스를 찾았다. 아버지와 새엄마와 함께 살았는데 아버지는 2년 전 돌아가셨다. 남자친구와 술을 잔뜩 마시고 정신을 잃었는데 임신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낙태할 용기가 없어 남자친구에게 말을 했지만 그는 아이를 키울 마음은 없었다. 아기를 어찌해야할지 몰라 군대가는 남자친구에게 낙태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연락을 끊었다.
그녀가 베이비박스를 찾은 건 출산 직전이었다. 나는 그녀를 우리와 결연을 맺고 있는 병원에 소개해 출산을 도왔다. 그녀는 출산 후에도 아기를 키울 것인지 입양을 보낼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의 미래를 위해 입양을 추천했다. 결국 그녀는 입양을 결정했고 법적 절차를 거쳐 아이를 영영 떠나보내야 할 날이 밝았다. 아이를 보내기로 한 날 아침 그녀는 아이를 보내지 않겠다고 알렸다. 입양을 결정한 뒤에도 그녀는 어떻게든 아이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았고, 큰엄마 집에서 할머니가 양육을 맡아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함께 전했다. 아이를 품에서 놓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 있었던 용기는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예기치 못한 임신과 출산을 겪은 당사자는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이런 순간에 누군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위로가 된다. 조금의 도움으로 다가가 준다면 다시 아이를 키울 용기를 내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본질은 피치못할 상황으로 아이가 맡겨졌을 때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또한 부모가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있도록 상담하고 돕는 일도 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는 다른 한국형 베이비박스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온유로 인해 만들어진 베이비박스가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했다. 지난 13년 동안 도무지 막막한 현실 앞에 아이를 어쩌지 못하고 베이비박스로 온 엄마들이 어느덧 2000명이 넘었다. 그 중 264명의 엄마들은 다시 아이를 품에 안고 베이비박스를 걸어 당당하게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다른 엄마들도 자신이 처한 극한의 환경에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최상의 선택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베이비박스를 찾은 엄마들은 기어이 생명을 낳은 사람들이다. 비록 아이와의 헤어짐을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도 아이가 안전하게 보호되고 가능한 좋은 환경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파른 난곡동 언덕길을 올랐다.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아이를 버리기 위해 출산하는 엄마는 없다.
온유가 담겨졌던 굴비상자 안에는 까만 비닐봉지와 메모지가 함께 있었다. 봉지 안에는 우유병 한 개와 기저귀 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온유를 싸고 있던 배냇저고리에 붙어 있던 메모지에는 어떤 절박함이 담긴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태어난 날도 이름도 없이 굴비 상자에 담겨 내게 왔던 온유는, 지금 밝고 건강한 일상을 사는 열다섯 소녀가 되어 사랑을 가득 받으며 자라고 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눅 2:12)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마굿간 구유 위에 나셨던 예수님처럼, 굴비 박스 안에 담겨 내게 왔던 온유로 인해 베이비박스가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많은 엄마와 아이들이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셨던 것처럼, 굴비상자에 담겨 내게 왔던 온유를 통해 하나님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온유로 인해 시작된 과분한 사랑을 베푸셨다. 그 해 나는 온유를 내 딸로 입양했다.
주사랑공동체 베이비박스 운영자 이종락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