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행하는 신조어 ‘빌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아시는지? 범죄영화 등에 악당으로 나오는 빌런은 요즘엔 당당히 이야기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할리우드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출연한 영화 ‘조커’의 경우가 그렇다. 조커는 배트맨 때문에 삶의 의미가 있고, 배트맨도 조커 같은 미치광이가 갑자기 개과천선한다면 고담시에서 활동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빌런이란 악당이긴 하지만 마냥 나쁘게 볼 수만은 없는 흥미로운 캐릭터다.
그래서 빌런은 때로 범죄자라기보다 ‘괴짜’에 가까운 개념으로 쓰인다. 그들은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 곳곳에서 활동한다. ‘지하철 빌런’ ‘카페 빌런’ ‘식당 빌런’ ‘주차장 빌런’ 등등.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헌책방 빌런’ 역시 존재한다!
나는 헌책방에서만큼은 ‘빌런’을 ‘진상’과는 구별해서 말하고 싶다. 진상은 말 그대로 가게에 와서 소란을 끼치고도 태연하거나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빌런은 소란을 피우되 그에 상응하는 도움도 준다. 그래서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반가운 얼굴로 맞기도 뭣한 그런 손님이다.
헌책방 빌런인 그는 올 때마다 2만∼3만원 정도씩 책을 산다. 하지만 사는 책과는 별개로 책방에서 읽고 가는 책도 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책방에 오는데 어떤 책 한 권을 몇 달에 걸쳐서 조금씩 읽고 가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헌책방이다 보니 대부분 책은 재고가 한 권뿐이다. 도서관도 아니니까 빌런이 읽고 있던 책을 팔지 않고 따로 맡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느 날 왔을 때 읽던 책이 팔리고 없으면 화를 낸다. 당황스럽다. 화를 낸 다음엔 여느 때와 같이 다른 책 한 권을 꺼내 조금 읽은 다음 다시 책장에 넣는다. 물론 이때도 어김없이 몇만원어치 책을 산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해서 한 번은 빌런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대답이 또한 그의 행동만큼이나 묘했다. 책을 사서 편하게 집에서 읽는 게 물론 좋지만, 어떤 책은 집보다 이곳 책방에서 읽는 게 더 어울린다는 거다.
지독히도 괴짜 같은 사람이지만 얘기를 나눠보니 책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게 느껴졌다. 게다가 헌책방 빌런은 책 영업도 한다. 책을 읽고 있을 때 다른 손님이 책 구경을 하고 있으면 은근슬쩍 그 옆으로 가서 이런저런 책을 추천한다. 말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손님 중 열에 아홉은 책을 산다. 심지어 어떤 손님은 그가 헌책방 주인이고 내가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착각했던 일도 있다.
이렇게 헌책방 매출에도 적잖이 도움을 주고 있지만 아무튼 빌런은 빌런이다! 여긴 도서관이 아니니까 읽던 책을 맡아주거나 할 수는 없다. 올 때마다 책을 읽고 가지 말라며 가볍게 주의를 시킨다. 요즘엔 이 손님이 내게 주의를 받는 것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기분마저 든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조커와 배트맨처럼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돼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