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살 윤진석은 시계만 그린다. 그가 그린 캔버스에는 시계가 빼곡하다. 모두 어릴 때 특정 장소에서 본 시계들이다. 대우전자서비스, 하나복사, 청도오리백숙, 당감금은방, 해운대그랜드호텔…. 이미지 옆에는 시계를 본 장소가 적혀 있다. 예닐곱 살 때 본 걸 정확하게 장소까지 기억해 그려내는 윤진석은 자폐아다.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 수영장에 있던 바이올린 모양의 시계를 제일 좋아하는지 그림마다 그 시계가 있다.
국민일보가 창간 34주년을 맞아 원로 미술가 이건용 선생과 함께 시작한 제1회 아르브뤼미술상 공모전 수상작 전시 개막식이 지난 1일 열렸다. 한국공예문화디자인진흥원(KCDF)이 운영하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KCDF갤러리에서다.
아르브뤼미술상 공모전을 총괄기획하며 전시 투어를 진행한 필자가 ‘왜 시계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소리가 나서요.” “째깍째깍 소리가 나서요.” 전 국민을 울게 만든 영화 ‘말아톤’ 주인공 ‘초원이’ 말투 그대로의 낯선 고음. 순간 울컥했다. 재능을 찾아 예술로 숨구멍을 찾게 해주기까지 가족이 감내했을 고통과 헌신의 나날이 물컹하게 만져지는 기분이 들어서다. 윤진석 작가 어머니는 “진석이가 ‘엄마’ 다음으로 한 말이 ‘시, 시계’였다. 낯선 장소에 가면 불안해하며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시계는 어디 가도 있고 늘 같은 역할을 하는 걸 보며 시계에서 안정을 찾았던 거 같다. 진석이에게 시계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고 거들었다.
수상자들은 모두 10∼30대들이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그들이라는 걸 알긴 했다. 공모전에 응모할 때도 대신 지원서를 내주는 가족이 있었고, 시상식장에도 엄마든 아빠든 누나든 꼭 가족이 동행했다. 작가 인터뷰를 하러 전화했을 때도 보호자가 받았다. 부모를 인터뷰하며 윤진석 작가의 경우처럼 매번 가슴이 먹먹해졌다.
화선지에 글자를 가득 쓰는 최노아 작가는 ‘엄마의 힘’을 느끼게 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학교에서는 곤혹스러워했다. 가방에 있는 공책을 꺼내 보니 같은 글자를 반복해 쓴 게 눈에 띄었다. 작가의 어머니는 “반복적인 쓰기를 통해 노아가 심리적 안정을 찾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센터에서 서예를 배우게 했다.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는 걸 좋아하고 몰두했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가 찾아준 서예 작업이 미술로 발전한 것이다.
자폐아의 특징은 반복과 집착이다. 사회에서는 단점이라고 보는 그 특성이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무기가 됐다. 누군가에게는 로봇, 누군가에게는 시계, 누군가에게는 무지개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오롯이 사는 거 같지만, 그러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 로봇 그림으로 대상을 받은 김경두 작가는 한 점의 대형 로봇에는 강해지고 싶은 마음을, 무수하게 그린 작은 로봇에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이다래 작가는 빈방으로 비쳐드는 햇살에 식물들이 무성히 자라 자신의 친구가 돼주는 판타지를, 박찬흠 작가는 어항·민물·바다 등 각기 다른 곳에 사는 물고기를 한 화면에 그려 넣어 장애가 있든 없든 어울려 사는 세상에 대한 소망을 담았다.
전시장을 찾은 사진작가 강홍구씨는 “이미지들이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다. 장애 작가들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구나, 현실에서는 그 말을 다하지 못하니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구나 싶었다. 그 절절한 마음이 온전히 느껴지는 전시”라고 말했다. ‘경계 없는 세상’이 시대의 화두가 됐다. 우리 모두 그 기치에 공감한다. 전시장에 와서 작품을 감상하고 폭발하듯 그림으로 쏟아낸 절절한 그들의 마음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 역시 경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작은 실천이라 생각한다. 전시는 20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