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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할아버지들이여, 분발하시라



월요일마다 일본어를 배우러 다닌다. 특별히 학원을 다니거나 개인 교습을 받는 게 아니다. 가까운 구청에 소속된 여성복지관에 간다. 비용이 저렴한 데 비해 두 시간 교습 내용은 꽤 알차다. 선생님이 미리 카톡으로 보내준 최신 일본 뉴스를 함께 읽는다. 그러고 나서 우리 수준에 맞는 문법 교재와 독해를 이어 나간다. 요즘 읽는 책은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소설 버전이다.

오래전부터 수업에 참석해온 학생들은 거의 60, 70대 여성들이다. 초등학교 손주들이 두셋씩 있는 할머니들이다. 나 같은 50대 중반은 매우 어리고 귀여운 축에 속한다. 죽자 사자 급수 따기 공부를 하는 분위기였다면 스트레스를 받아 진작에 나가떨어졌으리라. 진도를 나가는 방식이 충실하면서도 유동적이다. 수업 중에는 일본어로만 말하기로 약속했지만 그럴 수가 있나. 머리보다 입이 빠른 학생들은 시시때때로 자기 경험을 쏟아낸다.

분가한 자식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 요양원에 누워 있는 부모님, 부쩍 여기저기 쑤시는 몸. 재미있었던 가족 여행과 새로 시작한 드라마까지. 배우는 건 일본어지만 어쩐지 각자의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랄까. 내게는 일종의 친목회 역할을 한다. 주위에서 만나기 어려운 ‘언니’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는 걸 관찰할 수 있다. 꼭 10년 후 나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활기차게 에어로빅을 즐기는 ‘할멈체력’. 일본어 하나로는 모자라 영어에다 중국어까지 섭렵하는 똑순이. 돋보기를 대야만 보이는데도 예습 복습을 빠뜨리지 않는 최고령 어르신. 방송대 일본학과에 도전해 학사모를 쓴 용감한 늦깎이. 같은 반 ‘친구’인 내가 책을 낼 때마다 사인해 달라고 부탁하는 독서가도 있다. 일본 여행을 다녀오면 맛난 현지 과자를 사와서 돌리는 푸짐한 언니들.

가끔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보태는 바람에 진도를 못 나갈 때가 있다. 주로 남편 얘기가 나오면 그렇다. 다들 결혼한 지 사십년 넘은 기혼 여성들이고, 이제는 한집에 부부만 덜렁 남았다. 할머니들은 자식들 반찬 만들랴, 손주 돌봐주랴, 일본어 공부하랴, 친구들 모임 나가랴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반면 일 없는 할아버지들은 턱 내밀고 밥 차려주기만 기다리고 있단다. 돕지는 못할망정 아내의 시간과 발목을 잡으니 갈등이 깊어질 수밖에.

일본에서는 나이든 남성들을 ‘고장 난 냉장고’나 ‘젖은 낙엽’에 비유하곤 한다. 아무도 관심이 없어 방치된 채 걸리적거리는 냉장고. 깔끔하게 쓸리지 않고 지저분하게 붙어 다니는 축축한 낙엽. 그러고 보니 ‘황혼이혼’이라든가 ‘졸혼’ 등은 다 일본에서 먼저 생긴 개념이다. 우리보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주의가 심한 문화라서 여성들이 더 힘들었나 보다. 육아와 살림의 책임을 다했으니 이제라도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의지에 불을 댕긴 것이다.

일터 외에는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가족과도 끈끈한 정을 이어오지 못한 할아버지들은 은퇴 후의 시간이 버겁기만 하다.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뭐가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야 시간이 생겨 절정으로 피어오르는 할머니들 옷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되나. 여기저기 멋지고 활기차고 도전하는 할머니들은 쏟아지는데 할아버지들의 활약은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남성들의 롤 모델도 보이지 않는다.

점점 퇴직은 빨라지고 시간은 많아질 전망이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가까운 도서관이나 문화센터, 여성복지관으로 눈을 돌려보자. 특히 여성복지관은 이름과 다르게 몇 년 전부터 남성들에게도 문을 활짝 개방했다. 평소 해보거나 배우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다양한 강좌가 준비돼 있다. 마침 우리 일본어 반에도 스마트한 할아버지 새내기가 한 분 등장했다. 느긋하게 공부하던 언니들의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당분간은 남편들 흉도 못 볼 것 같다.

마녀체력 (‘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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