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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다름을 바라보기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색깔에 대한 사유가 담긴 저서 ‘검은색’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인간 동물의 가장 객관적인 표시는 어떠한 색깔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특히 인간 동물이 검은색일 수 없고, 정말로 검은색일 수 없는 만큼이나 흰색일 수도 없으며, 하물며 노란색이나 (햇볕에 심한 화상을 입은 경우가 아니라면) 붉은색일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이 바라는 보편적 차원에서는 백인도 흑인도 결코 실존할 수 없다. 인류는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

이 말인즉슨 인간의 피부는 어떠어떠한 색으로 명확히 구별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색의 구분에 따른 인종적 구분 역시 무의미하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백인’ 혹은 ‘황인’이라는 구분이 무색할 만큼 같은 인종으로 취급되는 여러 사람의 피부색은 모두 다르다. 당장 한 교실에 모인 아이들을 보더라도 피부색이 완전히 똑같은 두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는 감정에 따라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햇볕에 오래 노출되는 여름에는 평소보다 어두운 피부를 갖게 되기도 한다. 피부색이란 불변하는 본질이 아니라 유동적인 스펙트럼이며, 그러므로 인종 구분은 사실 우리 머릿속에서만 이뤄지는 일종의 허상이다.

물론 이런 허상에 의해 발생한 폭력의 피해자들이 서로 연대할 때 폭력의 근원이 되는 허상을 구성하는 관념, 이를테면 ‘흑인’이라는 관념을 내세워 연대하는 일은 당연하게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흑인이라는 관념에 의해 이뤄진 것과 비슷한 소외와 차별의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Black Lives Matter’ 역시 흑인이라는 관념하에 이뤄진 것과 유사한 차별의 경험들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구호다. 비단 피부색뿐 아닐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차별의 원천인 구분과 배제는 대체로 머릿속 허상에 가까울 것이며, 이를 반성하고 고쳐가는 일이 폭력의 근절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돼줄 것이다.

김선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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