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지용목사의 사순절 신앙고백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③ 갈릴리를 밟다(하)

정치 경제 군사적 요충지에 세운 군왕들의 전략도시를 복음이 정복하다
 
가버나움에서 바라본 갈릴리 바다. 


코로나19 감염사태가 한창인 요즘은 사순절 기간이며 또 고난주간이다. 전통적으로 중세 가톨릭 시대에 특별한 의미를 갖고 종교적 형식으로 진행된 사순절은, 종교개혁시대를 지나 현대 시대로 접어들면서 종교적 형식보다는 신앙의 본질에 무게를 둔 ‘경건성’에 의미를 두고 진행된다. 이에 올해 초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 이지용목사(뉴욕겟세마네교회 담임)를 통해 성지순례에서 느낀 신앙고백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를 ① 광야에 대하여 ② 갈릴리에 대하여(상)(하) ③ 예루살렘에 대하여 순으로 4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가이사랴: 헤롯 대왕에 의해 BC 22~10년에 세워진 지중해 해변의 항구 도시입니다. 헤롯의 건축물은 아직까지도 잘 보존될 만큼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항구와 수로, 원형경기장 및 도로, 대리석으로 꾸며진 화려한 신전과 궁전 등은 당시의 모습과 건축 기술을 추측하게 합니다. 그가 남긴 극장은 아직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도시에서 ‘고넬료’라 하는 이달리야대 백부장은 베드로 사도를 불러 이방인으로서는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이 되었습니다(행 10:1-43). 아울러 바울 선교 여행의 기지이기도 하였으며(행 9:30, 18:22, 21:8), 그가 로마로 호송되기 전 2년 동안(BC 58~60) 이 도시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행 24:27), 그때 로마 총독 벨릭스와 후임자 베스도, 그리고 유다왕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변론을 펴기도 했습니다(행 25 - 26). 바울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면서 이 항구와 작별하였던 것입니다.

원형 경기장과 신전 등 화려한 도시, 가이사랴
복음 들어서자 인간욕망의 하수 뿜어내는 타락상 노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이끌어가는 인간사의 본질 깨닫길

 
이지용목사는 지난 1월26일부터 2월8일까지 일정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가버나움에 남아있는 웅장한 건물 기둥들.


십자군은 이 도시를 악고와 욥바와 더불어 중요한 항구로 개발하였으며, 아름다운 성문과 성채를 수축하였으나, 1265년 마므룩(Mamluk sultal Baybars)에 의해 점령되면서 십자군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옛 항구자리의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십자군 건물을 이용한 식당과 예술품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어 옛 도시의 매력을 남겨 놓았습니다. 

앗시리아 침공이후 사마리아인과 혼합하도록 정책추진

△사마리아: 이스라엘 왕국의 여섯 번째 왕인 오므리가 원래 ‘세멜’(세멜이 개인인지 어떤 부족인지는 확실치 않다)로부터 이 지역을 은화 두 달란트에 사들여 사마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기원전 884년경). 이 도시는 바위산의 정상에 세워졌는데, 교통의 요지이면서 외적을 방어하기도 좋은 천연 요새지였으며, 고대의 포도주와 기름의 생산지로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실체가 밝혀졌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 왕 때 앗시리아가 사마리아를 침공해 도시를 점령하고 모든 사마리아 지역의 거주민을 앗시리아로 포로로 강제이주시켰고 바빌론과 쿠다(Cuthah)등 지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마리아에 거주시켰습니다. 사마리아에는 세례자 요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믿어져 왔고 나중에 세례자 요한을 위한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 도시여서 ‘어깨’라는 뜻 가져

△세겜: 예루살렘에서 세겜 길을 따라 약 60Km 지점에 있습니다. 뜻은 ‘어깨’라는 뜻으로, 에발산과 그리심산을 양쪽 어깨에 메고 있는 듯이 두 산 사이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일찍이 주전 1850년경에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이곳 세겜에 이주해 왔고(창 12:6-7), 그의 손자 야곱은 천막과 제단을 세우기 위해 땅을 매입했습니다(창 33:18-19). 야곱의 딸 디나는 세겜에서 하몰의 아들 세겜에서 강간을 당하여 이후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거민들을 살육함으로서 디나에 대한 보복을 하였습니다(창 34장). 

이곳은 또 요셉의 유언대로 출애굽 할 때 가져온 요셉의 시신을 매장하였습니다(수 24:32).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아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였습니다(수 24장). 주전 9세기에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은 수도를 세겜에서 사마리아로 옮김으로써 세겜은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주전 722년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세겜에 앗시리아 인들이 대거 이주해왔으며, 이후 세겜 사람들은 이민족과 피가 섞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남 유다 유대인들은 혼종이 된 사마리아인들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독자적인 종교생활을 다지기 시작하였고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서만 성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적대시하게 됐습니다.

신약시대에 빌립, 요한 그리고 베드로는 세겜,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행 8:4-5). 비잔틴 시대에 세겜과 그리심산에 교회가 세워졌고, 1948년 독립 당시 세겜은 요르단에 속했었으나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지 ‘실로’, 하지만 하나님 떠나자 ‘몰락’

△실로: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선언한 이후, 이스라엘의 수도 문제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수도가 엄청난 이슈를 만든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의 수도는 곧 성전이 있는 장소요,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호수로부터 요단강으로 연결돼 있는 사해.


출애굽 광야 노정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1406년 정월 10일, 요단강을 건너와 길갈에 진을 쳤습니다(수 4:19, 5:10). 길갈은 가나안 땅의 주요 거점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 약 6년간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의 임시 수도였으며 성막이 위치했습니다. 여호수아 10장은 길갈이 기브온 족속과 조약을 맺은 외교적 수도이자, 전쟁이 끝나면 귀환하는 곳으로 이스라엘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줍니다. 

가나안의 주요 거점 정복을 마친 주전 1400년, 이스라엘 온 회중은 길갈에서 약 32km 떨어진 실로에 모여 성막을 세웠습니다(수 18:1-2). 길갈은 요단 강가에 너무 치우쳐 있었지만, 실로는 거리적으로도 가나안의 중심부이자, 사마리아 산지의 비옥한 평원을 끼고 있는 등 수도에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이후 주전 1102년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긴 뒤 성막이 놉으로 옮겨가기까지(삼상 4:1-11, 21:1-6, 22:11,19), 약 298년 동안 성막은 실로에 있었으며, 실로는 사무엘이 다스리던 시기까지 이스라엘의 수도로 여겨졌다. 그래서 예레미야 7:12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가 실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로가 이스라엘의 수도로 여겨진 기간은 사사 시대와 거의 일치합니다. 실로에서는 매년 절기를 지키는 제사가 드려졌으며(삿 21:19),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실로로 나아왔습니다(삼상 1:3, 9, 24). 게다가 실로는 유대 산지보다 강우량이 많고 분지가 잘 발달하여 농경에도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사사 시대 동안 실로는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로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성취 위해 옮긴 언약궤가 되레 패망의 이유

출애굽 이후 길갈까지 계속해서 이동했던 성막은 실로에 도착해 한 자리에서 298년간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유대 문헌인 탈무드나 미쉬나에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더 튼튼하게 외곽에 돌담을 쌓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사무엘상 3:15에서 어린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다”라는 표현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돌담을 쌓았다는 것은 다시는 성막이 이동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를 함의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로를 떠나셨을 때, 실로의 번영도 빛이 바래고 말았습니다. 실로가 이스라엘의 수도 역할을 했던 것은 무엇보다 그 가운데 성막이 진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지성소에 모신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표였습니다. 그런데 주전 1102년, 아벡 전투를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대신에 하나님을 끌고 나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를 제멋대로 전쟁터로 가지고 나간 것이지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살았던 가버나움의 한 거주지 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라는 신앙으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간 것이 아니라, 마치 사나운 짐승이나 무서운 무기를 들고 나가듯이 언약궤를 들고 나가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부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무서운 범죄는 엘리 제사장과 그 두 아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참극으로 이어졌습니다(삼상 4:3-18). 그 시대를 반영하는 고백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뜻의 ‘이가봇’입니다(삼상 4:21). 언약궤가 없는 실로의 성막은 그 역할을 상실했고, 성막은 실로를 떠나 놉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성막이 떠나버린 실로는 서서히 잊혀진 변방의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뿌리박은 척박한 땅 예루살렘의 영광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뒤, 예루살렘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다윗 당시에는 시온산 하나만이 예루살렘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예루살렘의 면적은 엄청나게 확대되고 번성한 도시가 됐습니다. 예루살렘은 실로와 달리, 농경이 거의 불가능한 척박한 땅입니다. 그런 척박한 예루살렘이 황금성과 같이 찬란한 모습으로 발전된 것은 오직 성전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정 시대가 지나면서 예루살렘은 외형적으로 눈부신 발전은 거듭했지만, 점차 예배를 멸시하고 안식일을 짐으로 여기며 율법을 우습게 생각하는 타락이 퍼져 나갔습니다. 결국 남 유다의 멸망을 앞두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를 둔 처소 실로에 가서 이스라엘의 악에 대해서 어떻게 심판을 행하였는지 보라”고 강력히 경고했습니다(렘 7:12-14, 26:6).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눈물의 메시지를 듣기는커녕 멸시하였고, 마침내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버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겔 10:18). 

실로의 성막이 떠나버렸듯이, 영원할 줄 알았던 예루살렘의 성전 역시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공으로 완전히 불타 무너져버렸습니다. 실로에 있던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듯이, 예루살렘 성전의 언약궤는 바벨론에 빼앗겨 행방을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실로를 통한 경고와 회개의 메시지를 듣지 않았을 때, 예루살렘도 실로의 뒤를 따라가고 만 것입니다. / 뉴욕겟세마네교회 담임

[기고]이지용목사의 사순절 신앙고백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② 갈릴리를 밟다(상)
【기고】 이지용목사의 사순절 신앙고백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① 광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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