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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트루디 (16) 강의 시간을 전도 기회로 삼고 말씀 묵상 시간 가져
트루디 사모가 1980년쯤 한 대학교의 강의실에서 대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모습. 나는 1962년 한국말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수원여자중학교에서 다른 학생들과 공부했다. 그때 내 나이는 24세였는데 나 말고도 만학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생활은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10여년 차이 나는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국어 실력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학교 교장선생님이 나에게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 시간을 전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 50분을 전후해 말씀 묵상을 ...
입력:2021-10-14 14:05:02
[역경의 열매] 트루디 (15) 유명세 타고 언론 집중조명… 궁리 끝에 공군병원 입원
김장환(왼쪽) 목사가 1973년 6월 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전도 집회에서 설교를 통역하고 있다. 이날 전도 집회에 11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남편은 언론에 나오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방송사 사장이기 때문에 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데 익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미국과 국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건 1973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통역을 맡고부터였다. 그전에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설교를 하고 YFC 국제회의도 참석했지만 빌리 목사의 여의도 전도대회 광경이 미국 ...
입력:2021-10-13 14:05:03
[역경의 열매] 트루디 (14) 울타리 없는 서양식 집… 부자로 착각 거지·도둑 줄이어
트루디(왼쪽 첫 번째) 사모가 1961년쯤 첫째 아들 김요셉군을 안고 남편 김장환(왼쪽 두 번째) 목사, 지인들과 함께 수원 인계동의 집 문 앞에 앉아서 사진을 찍고 있다. 트루디와 빌리라고 적힌 대문 문패도 세워져있다. 처음 집을 지을 때 남편은 돈을 아끼기 위해 울타리를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거지가 찾아올 때도 많았다. 농촌마을에 서양식 집이 떡하니 자리했으니 부잣집인 줄 알고 구걸하러 온 것이다. 어떨 때는 하루에 10명 넘게 온 적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 돈보다 쌀을 주면서 손을 붙잡고 기도를 해줬다. “하나님 귀한 형제가 가난을 벗게 해...
입력:2021-10-12 14:05:08
[역경의 열매] 트루디 (13) “인부 구해주세요” 밤마다 기도… 모범수들 건축 도와
김장환(오른쪽) 목사가 1961년쯤 수원 인계동에 새롭게 지은 집 앞에서 첫째 아들 요셉군을 안고 지인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봄이 되면서 남편은 우리 부부가 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초가집은 14명의 대식구가 살기엔 너무 좁았고 무엇보다 선교를 하기 위해선 조금 더 넓은 집이 필요했다. 남편은 미국에서 올 때 친구들이 모아준 500달러로 땅을 보러 다녔다. 지금이야 500달러는 큰돈이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상당한 액수였다. 남편은 시댁에서 도보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인계동에 땅 1200평을 샀다. 현장을 둘러보니 주변에 집이 단 한 채도 없었다. 지금은 ...
입력:2021-10-11 14:10:04
[역경의 열매] 트루디 (12) 한국 음식 적응 못해 “어머님, 고추장 맵고 김치 시어요”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오른쪽) 목사가 1960년쯤 수원에서 어머니 박옥동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 “또 남겼네.” 시어머니는 늘 밥그릇에 밥을 가득 얹어주셨다. 반찬이 좀처럼 입에 맞지 않았던 나는 밥에 거의 손도 대지 못했다. 나를 생각해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 주시기도 하셨지만 들기름 냄새 때문에 먹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었지만 20여년 동안 입에 밴 식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기 어려웠다. “어머님, 죄송한데 고추장이 맵고 김치는 너무 시어요.” 나는 집안에 있는 각종 과자를 찾아 먹었다....
입력:2021-10-10 14:05:03
[역경의 열매] 트루디 (11) “국수에 생선이 둥둥…”하며 기겁하자 사람들 박장대소
트루디(왼쪽에서 두 번째) 사모가 1960년 2월 시댁 친인척, 지인들과 함께 방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인천에서 본가인 수원에 도착할 때쯤 하늘은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초가집 마당에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우리 부부가 들어서자 모두들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고등학생 때 미국을 떠난 빌리(김장환 목사)가 미국인 부인을 데려온 것이 마냥 신기했던 모양이다. 나는 시어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처음 입는 한복이라 그런지 저고리 매무새 등 모든 것이 어색했다. 한복을 입고 나오자 누군가 내가 배가 고플 거라고 생...
입력:2021-10-07 14:05:03
[역경의 열매] 트루디 (10) 날 껴안은 시어머니 “예쁘게도 생겼네, 꼭 한국 사람처럼”
트루디 사모가 1959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메이든 크리크 화물선을 타고 한국 인천항으로 오는 배 안에서 머플러를 머리에 두른 채 사진을 찍었다. 1959년 11월 우리 부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메이든 크리크라는 화물선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어릴 때 호숫가에서 고무보트를 타고 놀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배를 탄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망망대해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배를 타고 오는 17일 동안 남편과 내가 한 일이라고는 갑판에 앉아 책을 읽거나 대화하는 것뿐이었다. 우리 부부는 크루즈 신혼여행을 한다는 생각으로 즐겁...
입력:2021-10-06 14:05:02
[역경의 열매] 트루디 (9) 남편의 한국행 결심에 “주님 뜻 이룰 수 있게…” 기도
트루디(오른쪽) 사모와 김장환 목사가 1958년 8월 8일 결혼을 기념하며 찍은 웨딩 스냅사진. 결혼한 뒤에도 우리 부부는 무척 바쁘게 생활했다. 남편 빌리(김장환 목사)는 주말마다 설교를 했다. 많진 않았지만 사례비로 월세와 식료품비, 대학원 학비 등을 낼 수 있었다. 남은 돈은 꼬박꼬박 저축했다. 허니문은 꿈같은 말이었다. 주변에선 “신혼을 좀 더 즐기라”고 말했지만 나는 불만은 없었다. 정신없이 바빴지만 빌리가 늘 다정다감하게 대해줘 행복했기 때문이다. 주의 일을 하는 남편을 따라다니는 사모의 행복을 그때부터 조금씩 알게 된 ...
입력:2021-10-05 14:05:02
[역경의 열매] 트루디 (8) 어머니, “가난한 한국에 시집 못 보내” 극구 반대
트루디(왼쪽) 사모와 김장환 목사가 1958년 8월 8일 미시간주 그린빌 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빌리(김장환 목사)와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지 일주일 만인 1958년 8월 8일 저녁 8시, 미시간주 그린빌 감리교회에서 결혼했다. 결혼식 당일 한국에서는 아무도 오지 못했다. 칼 파워스 상사가 빌리의 들러리 역할을 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시댁 식구 누구에게도 허락을 받지 않고 결혼한 셈이다. 빌리는 나와 결혼을 결심한 뒤 한국에 ‘미국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편지를 써서 결혼을 알렸다. 개인 전화도 없고 한국에 다녀올 여건도 못되...
입력:2021-10-04 14:10:02
[역경의 열매] 트루디 (7) 4개월 만에 화해… “다신 헤어지지 말자” 약속
김장환(왼쪽 첫 번째) 목사가 밥 존스 대학교 재학 시절 축구부 주장으로 활동하던 모습. 내게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빌리(김장환 목사)를 보면서 나는 큰 오해가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 순간에는 이런저런 얘기를 해봐야 변명밖엔 안 될 것 같았다. 조용히 빌리의 반지를 돌려줬다. 빌리가 감정적으로 동요된 상태이고 나중에 화가 풀릴 것이라 생각해 일단 위기 상황을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빌리는 나와 만나지 않기로 이미 결심한 것 같았다. 방학이 되고 내가 미시...
입력:2021-10-03 14:10:01
[역경의 열매] 트루디 (6) 나의 청혼에 “대학부터 졸업하라”… 증표로 반지 교환
밥 존스 대학교 재학 중 교제하던 시절의 트루디(오른쪽) 사모와 김장환 목사.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빌리(김장환 목사)가 대학교 2학년이 됐을 때 우리는 정식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스운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빌리에게 “결혼하자”고 제의했다. “난 대학 졸업 안한 여자와 결혼 안 해.” 나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는데 빌리는 내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러면서 “나와 결혼하고 싶으면 대학을 졸업하라”고 말했다. 빌리가 대학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 버릴 것 같은 조바심 때문에 꺼...
입력:2021-09-30 14:05:04
[역경의 열매] 트루디 (5) 사랑에 빠진 트루디, 빌리의 어린 시절 궁금해져…
6·25전쟁 중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를 하던 시절 김장환(오른쪽) 목사와 칼 파워스 상사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빌리(김장환 목사)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에서 간증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고등학교 3학년 때 신학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주말마다 선배들과 시골로 전도집회를 다녔다. 나 역시 빌리가 강단에 선 모습을 몇 번 봤는데 학생들에게 그의 강연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떤 날은 비행기를 타고 미국 남부에 있는 아칸소 주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유명세가 퍼지자 빌리는 대학교 3학년 때쯤엔 이 도시 저 도시로 불...
입력:2021-09-29 14:10:02
[역경의 열매] 트루디 (4) 첫 데이트 후 “우리 함께 기도하자” 빌리의 말에 감격
트루디(왼쪽) 사모와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밥 존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데이트 중에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빌리(김장환 목사)는 학교 내에서도 항상 유명했다. 그는 동양인이었지만 축구부 주장이었다. 웅변대회 상도 언제나 빌리의 차지였다. 지역대회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대회, 전국 웅변대회까지 휩쓸었다. 한국인 유학생이 고등학교 웅변대회에서 최고의 상을 받는 건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빌리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스타 중에 스타였다. 밥 존스 고등학교에서는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땐 반드시 편지를 먼저 보내...
입력:2021-09-28 14:05:04
[역경의 열매] 트루디 (3) 남학생들에게 인기… 데이트 신청 끊이지 않아
트루디 사모가 밥 존스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교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나와 형제들이 졸업한 밥 존스 학교는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있다. 학교는 규칙이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학교에서는 늘 성경 요절을 일주일에 3개씩 외우도록 했고 매주 드리는 채플에 늦으면 가차 없이 벌점을 줬다. 밥 존스 학생들은 한 학기에 벌점 150점을 받으면 제재를 받았다. 일종의 학사경고인 셈이다. 일거수일투족이 벌점과 관련이 있었으니 행동거지를 똑바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한 규율을 못 버티고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들도 한 학기에 10%나 됐다. 나는 이런 규율...
입력:2021-09-27 14:05:06
[역경의 열매] 트루디 (2) ‘내 안에 계신 성령’ 만나고부터 천국과 구원에 확신
트루디 사모가 학창 시절 미국 미시간주 레이크뷰에 있는 자택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어릴 때는 주일마다 교회에 꾸준히 가긴 했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부모님은 모두 신실한 신자였는데 어머니는 젊은 시절 선교사를 꿈꿨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엄마,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죠.” 이렇게 물을 때면 어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네 죄를 용서해주셨다”라고 설명해 줬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내 죄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ls...
입력:2021-09-26 14:05:04
[역경의 열매] 트루디 (1) 동양인처럼 생긴 나의 외모는 하나님의 빅 픽처?
트루디(왼쪽) 사모와 남편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2016년 극동방송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금도 사람들은 내게 “미국 사람인데도 동양인처럼 생겼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머리카락이 갈색인데다 체구도 아담하고 작아 동양적으로 보인다는 뜻인가. 지금은 익숙한 얘기지만 내가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땐 그런 점을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나로 말하면 오히려 작은 체구 때문에 친구들에게 ‘flea(벼룩)’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아담한 걸로 치면 코알라처럼 귀여운 동물도 있을 텐데 왜 하필 벼룩이었을까. 어쩌면 ...
입력:2021-09-23 14:10:02
[역경의 열매] 두상달 (30·끝) ‘하나님의 일’이 최우선… 원칙과 기본 철저히 지켜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가 지난해 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자택 마당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영화 ‘박하사탕’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첫사랑으로부터 배반당했고 아내에게도 이혼당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뒤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리고 철로 위에서 달려오는 열차를 마주 보고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하지만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연한 기회에 양수리와 가까운 문호리에 주택을 마련했다. 그동안 바빠서 잘 이용하지 못했지만, 코로나19가 온 뒤 자주 찾는다. 계절 ...
입력:2021-09-22 14:10:02
[역경의 열매] 두상달 (29) 기도하는 민족에 미래·희망 있어… 지도자 복음화에 노력
두상달 장로가 2019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51회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2019년 2월 초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국가조찬기도회에 몇몇 분과 함께 참석했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평신도가 거의 모든 것을 주관했다. 160여개국에서 온 대표단을 비롯해 3500여명이 기도회 장소에 비좁게 앉았다. 테이블마다 여야 국회의원이 1~2명씩 동석했다. 기도회 사회는 여야 상원의원이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했다. 1박 2일 동안 진행된 기도회에 각계 지도자들의 간증과 특송, 각국 지도자들의 간증이 계속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입력:2021-09-16 14:05:04
[역경의 열매] 두상달 (28) “나 교회 다니기 시작했어” 형수 말에 감격의 눈물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 부부의 세 자녀와 며느리, 사위를 비롯해 손자·손녀 등 3대가 한 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내를 만나기 전 ‘김영숙’이라는 여인과 데이트를 했었다. 그러다 동명이인인 아내를 만나 연애를 했다. 결혼을 약속한 뒤 청첩장이 나왔는데 그걸 보고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지인들이 청첩장 받으면 내가 전에 만나던 ‘김영숙’인줄 알겠네.” 무심결에 한 말이었는데 큰 실수였다. 그날 찍혀서 평생 구박받으며 살고 있다. 1969년 3월 22일 결혼식이 끝나고 호텔에 들어갔더니 아내...
입력:2021-09-15 14:05:04
[역경의 열매] 두상달 (27) 북, 최신 유행 청바지 받아보곤 “우리가 거지냐” 항의
‘북한 동포 겨울나기 사랑의 옷 보내기 운동본부’ 관계자들이 거리에서 옷 보내기 운동을 알리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97년 10월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전국에서 보내온 옷을 컨테이너에 싣는 모습. 우리나라도 6·25 전쟁 후 구호물자를 받아 연명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던 가난한 시절을 살았다. 1990년대 북한은 계속되는 흉년으로 식량뿐 아니라 입을 옷이 없어 혹한을 피할 길이 없었다. 비닐과 나일론을 섞어 만든 ‘비날론’이라는 섬유가 있었는데 이마저도 전력난으로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생산이 중단됐...
입력:2021-09-14 14:05:03
[역경의 열매] 두상달 (26) 민·군 화합의 장… “여러분은 예수 십자군” 사기 북돋워
제44차 CMBC 한국대회 참석자들이 2017년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연무대군인교회에서 팔을 들고 기도하고 있다. 2016년 초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회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육군훈련소에 6000석 교회를 짓는데 모금이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별 흥미 없이 시큰둥하게 듣다 매년 8만명이 세례를 받는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돕기로 마음먹었다. 김장환 목사께 상의 드렸더니 추진해 보라고 격려해 주셨다. 우선 육군훈련소에서 CBMC 한국대회를 열기로 추진했으나 반대가 많았다. 물러설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임원회에서 2017년 44차 한국대회 ...
입력:2021-09-13 14:10:01
[역경의 열매] 두상달 (25) 기독실업인회 중앙회장 맡아 변화 통한 성장 이뤄내
두상달(왼쪽) 장로가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과 2016년 서울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한국기독실업인회 신년하례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한국기독실업인회(CBMC)는 예수 믿는 사업가와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나는 오랫동안 CBMC 활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가끔 지회가 주최하는 VIP전도집회 강사로 선 일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이 나를 이사로 추천해 주셨고 ‘CBMC 새서울지회’ 창립 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열심히 활동하다 CBMC 중앙회장 제의를 받았다. 어떤 모임이든 자원해서 대표를 맡았던 기억이 없었다. 구레...
입력:2021-09-12 14:05:04
[역경의 열매] 두상달 (24) 굶어 죽는 생명 살리려 구슬땀… 도덕·투명·정직 강조
두상달(왼쪽 다섯 번째)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이사장과 기아대책 관계자 및 후원자들이 2014년 서울 종로 서울극장에서 열린 창립 25주년 행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제인조찬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경제계 어른들과 교제할 기회가 많아졌다. 한국유리 최태섭 회장님 소개로 1989년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창립에 참여하게 됐다. 기아대책은 71년 미국에 설립된 국제 기독교 구호단체다. 최 회장님이 초대 이사장이었고 나는 창립 이사였다. 창립 때 법인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이 원조를 받기만 했지 누굴 도와본 일...
입력:2021-09-09 14:05:03
[역경의 열매] 두상달 (23) 중동선교 37년… 잠자던 기독교인에 복음의 꽃 활짝
중동선교회가 2015년 연세대 언더우드선교상 단체부문을 수상한 뒤 두상달 이사장과 관계자들이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장로님은 왜 ‘3D업종’만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청소년 사역과 중동선교, 교도소 사역 등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봉사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슬람권 선교에 도전한 지 37년 됐다. 중동선교는 달걀로 바위 치는 격으로 힘들다. 그러나 누군가는 두드려야만 하는 절대적 사명이다. 나뿐 아니라 중동선교에 투신하겠다던 소수의 무리가 있었다. 1970년대 20만명이 넘는 한국의 젊...
입력:2021-09-08 14:10:02
[역경의 열매] 두상달 (22) 향락의 카페 골목… 믿음의 형제들과 거리 정화 나서
방배동 카페 골목에 각종 유흥업소가 가득하던 시절 모습. 1989년 음란과 퇴폐, 향락과 폭력이 지배하는 거리가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시절 방배동 카페 골목이 그랬다. 500명이 넘는 ‘삐끼’들이 호객을 했고 수시로 범죄가 일어났다. 당시 방배동에 살던 동료 집에 강도가 들었던 일이 있었다. 동료 가족은 이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나와 또 다른 방배동 주민까지 믿음의 형제 3명이 모여 성시화 운동의 일환으로 동네를 변화시키기로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대교회 교인들은 세상을 ...
입력:2021-09-07 14: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