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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장식 (16)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기 직전 가까스로 풀려나
서울 용산구 서울성남교회(옛 성바울전도교회)에 세워진 만우 송창근 목사 추모비. 성바울전도교회를 세운 송 목사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 서울성남교회 제공 그날 해 질 무렵 우리는 팔이 묶인 채 인민군에 이끌려 산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서대문형무소 옆을 지나 안국동 로터리에 있는 한 2층 건물 지하실이었다. 인민군 무리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릴 구둣발로 차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보다 먼저 산에서 잡혀온 청년이 있었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참을 맞은 우리는 어디론가 다시 ...
입력:2021-06-28 14: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15) 총성 들려 나가보니 “반동분자 쏴 죽여야…” 위협
완장을 찬 청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민들이 줄을 서서 배급을 받고 있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세검정 그 좁은 계곡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서울 수복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갖고 온 식량이 다 떨어지게 되자 사람들은 시내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갈 곳 없는 이들은 삼각산 산록 이곳저곳으로 흩어져서 피란생활을 계속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인민군이 전투에 동원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을 보는 대로 잡아가던 때였다. 나도 삼각산 기도원 자리에서 많은 사람과 며칠을 지냈다. ...
입력:2021-06-27 14: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14) 기독교를 정적으로 여긴 공산당… 목회자들 박해
한국전쟁 발발 다음 날 서울의 모습. 거리에 인적이 드물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세를 관망하며 학교에 나오던 학생들도 점점 모습을 감췄다. 고향이 먼 학생들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귀향길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들 몇몇은 내게 같이 남하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 남았다. 피란 갈 노자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연로한 교수님과 동료들이 학교를 지키고 있는데 최연소자인 내가 살겠다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남침해 내려온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진격해 가는 동안 교회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반공주의자들로 치부하고 심하게 박해했다. ...
입력:2021-06-24 14: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13) 졸업 후 모교서 강사 재직… 2개월 만에 한국전쟁
1950년 6월 28일 폭파로 파괴되지 않은 한강교를 그해 7월 8일 미 공군이 폭격하는 장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950년 4월 조선신학대학(현 한신대)을 졸업한 난 계속해서 학교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교수회 결정이었는데 교수님들은 나를 교수로 키우고자 하셨다. 난 교무과 일을 하면서 신학부에서 영어 고등문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저동에 있는 여자신학교에서 서양문화사를 가르쳤다. 당시 신학교는 교수 직급이 제도적으로 제정된 때가 아니었다. 때문에 내 직책이나 직급이 따로 있진 않았지만, 오늘날 제도에 비춰볼 때 전임강사에 해당했다. 아무튼 내 한신...
입력:2021-06-23 14:05: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12) 두 신학교 사이 깊어진 골 결국 메우지 못하고 갈라서
한국전쟁 직전 조선신학대학 이사장 함태영 목사가 말씀을 전하는 모습. 왼쪽부터 이장식 교수, 김재준 목사, 최윤관 목사, 송창근 목사. 내가 조선신학대학(현 한신대) 4학년이던 1949년 장로교 총회는 우리 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사이 깊어진 골을 메우려 애를 썼다. 두 신학교 합동 위원회를 조직해 절충을 시도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차는 확연히 달랐다. 조선신학대학 측은 양교의 무조건적인 합동을 내세웠다. 반면 장로회신학교 측은 김재준 교수님의 사퇴와 중요 신학 과목을 선교사들에게 맡기자는 조건을 고집했다. 결국 양교 합동은 좌초됐다. 6·25 ...
입력:2021-06-22 14:10: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11) 송창근·김재준·한경직… 신학대서 세 분의 참스승 만나
1947년 당시 서울 동자동에 있던 조선신학교 전경. 국민일보DB 조선신학대학(이후 한국신학대학, 현 한신대)을 다니면서 송창근 박사님과 김재준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을 만난 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 세 분은 교실에서 강의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목회를 통해서도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송 박사님은 성바울교회(현 서울성남교회)를 신학교 교정에 세웠다. 그는 재래의 한국교회 예배 의식을 혁신했는데 목회기도를 장로들이 맡아 드리던 통례를 버리고 목사가 드리게 했다. 설교와 기도 시간 길이도 제한했다. 예배가 1시간 정도면 끝났다.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
입력:2021-06-21 14: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10) 신학에 대한 열망에… 교사생활 접고 조선신학교로
1950년 4월 6일에 찍은 조선신학대학 학부 1회 졸업생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이장식 교수. 1년간의 계성중학교 교사생활은 보람도 있고 즐거웠다. 그러나 신학공부에 대한 열망이 계속 내 마음 속에 피어올랐다. 해방 직후였던 1947년에 대학은 몇 군데 되지 않았다. 남한에서 신학을 할 수 있는 곳은 연세대 신학과와 조선신학교, 감리교신학교, 성결교신학교 정도였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데 밀양에서 알고 지내던 윤술용 목사님이 나를 서울역전 동자동에 있던 조선신학교 교장 송창근 박사님께 소개해 줬다. 입학시험이 이미 끝난 시점이었...
입력:2021-06-20 14: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9) 모교 계성학교서 배운 적도 없는 국어 가르치게 돼
계성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1936년 10월 16일 열린 체육대회 모습. 당시 계성중 학생이었던 이장식 교수는 10년 뒤인 1946년 9월 계성학교 국어교사로 다시 체육대회에 참가했다. 계성고 제공 밀양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세력을 부리던 일본인들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미소나 수리조합, 면사무소 등 기관이 다 한국인들 손으로 넘어와 있었다. 다만 치안은 어수선했다. 지방별로 자치적인 민간단체가 생겨서 치안을 챙겼지만, 교육도 훈련도 받지 않은 마을 청년이 치안대원이랍시고 모인 게 다였다. 이들이 총을 ...
입력:2021-06-17 14: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8) 징용 끌려가 사지를 헤매다 그리웠던 어머니 품으로
해방직후 일본 야마가다현의 조선인 아이들. 이장식 교수는 야마가다현 조선인연맹본부에 취직해 이들의 명부 작성하는 일을 했다. 출처 블로그(gen4n) 캡처 초기 조선인연맹은 좌우 색깔 없이 순수하게 일본 내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뒀다. 나는 요네자와 지부에서 야마가다현 조선인연맹본부로 전근됐다. 교포들의 명부를 작성해 그들의 실정을 살피는 게 내 일이었다. 이때 일본 사회는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짖고 자랑하던 ‘야마토 다마사이’(일본 혼)라는 말도 쏙 들어갔다. 조선과 만주, 대만에서 높은 벼슬을 갖고 ...
입력:2021-06-16 14: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7) 굶주림과 밤마다 폭격 있을 거란 소문에 공장서 탈출
일본 도쿄 시민들이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듣고 있다. 출처 Japan’s Longest Day 가와사키와 시나가와는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됐다. 폭격으로 공장의 변전소가 불탔고 식당도 반파돼 공장 기능이 마비됐다. 난 공장으로 돌아갔다. 흩어졌던 동료들도 며칠 지나자 하나 둘 공장으로 돌아왔다. 폭격 이후 공장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루 식량은 주먹밥 한 덩이가 다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B29 폭격이 밤마다 있을 거란 소문이었다. 우린 밤이면 가까운 산으로 가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면 공장...
입력:2021-06-15 14: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6) 징용돼온 야금 공장에 B-29 폭격 ‘온 도시가 화장터’
미군이 1945년 3월 도쿄대공습 때 사용했던 B-29.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도 사용됐다. 출처 미국육군항공대(USAAF) 대학에 재학한 조선인 학생들은 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대 지원을 강요당했다. 어떤 사람은 중국 땅으로, 또 어떤 사람은 동남아로 끌려갔다. 내가 만일 일본에서 어느 학교에 입학했더라면 학병으로 어느 곳인가로 끌려갔을 것이고, 또 어떻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나 역시 징용을 피하지 못했다. 1945년 1월 징용명령서를 받았다. 마을 내 24세 남자들을 모조리 잡아가는 소위 횡단 징용이었다. ...
입력:2021-06-14 14:05:03
[역경의 열매] 이장식 (5) 학과시험 붙었으나 대답하기 곤란한 면접관 질문에…
일제강점기 말엽 소나무에 V자형 상처를 내 송진을 채집하는 모습. 산림청 제공 5년의 중학교 시절은 내게 있어 축복의 시간이었다. 매년 한 번씩 열린 신앙수양회에서 송창근 박사, 김재준 목사, 한경직 목사 등 당대 유명했던 믿음의 선배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분들을 보며 목사가 되겠단 꿈을 키웠다. 나는 1941년 4월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갔다. 바로 신학교로 가기보다 대학에서 좀 더 공부를 한 뒤 신학을 배우고 싶었다. 당시 조선엔 대학이 많지 않았다. 난 여비만 마련해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해가...
입력:2021-06-13 14: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4) 모든 중학생에 신사참배 강요… 행진 도중 숨어버려
계성중학교 시절 이장식 교수가 결성한 신앙동지회. 맨 앞줄 가운데가 이 교수다. 계성중학교 해럴드 헨더슨 교장은 인격자이며 교육자였다. 가끔 교목을 대신해 설교 말씀을 전할 때도 있었다. 미국 록키산 기슭에 살던 어느 부부가 야생 독수리 새끼 한 마리를 집안에서 키우다 날려 보낸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독수리가 어느 정도 크자 산에 올라가 몇 번이고 날려 보냈지만, 새장에서 커서 자유할 줄 모르고 공중을 날다 다시 새장으로 돌아오더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도 늘 끝은 부부가 독수리를 날려 보내는 데 성공하는 이야기로 맺었다. 헨더슨 교장은 ...
입력:2021-06-10 14:10:02
[역경의 열매] 이장식 (3) 열다섯 나이에 주점 취직… 장학생에 뽑혀 학업 이어가
이장식 교수의 모교회인 진해 경화교회. 가운데 한복 차림의 강상은 목사가 서 있다. 보통학교 졸업 동기생 120명 중 중학교에 진학한 사람은 단 셋뿐이었다. 나는 진해 일본해군공작소에 취직 시험을 치렀다. 학과 시험은 통과했으나 색약이 발견되면서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어머니의 실망이 크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태연하셨다. 어머닌 행상을 하며 알게 된 일본인 주점에 나를 소개해 취직시켰다. 내 나이 겨우 15세였다. 이 시절 일본인 상점주인들 중에는 조선인 점원들을 학대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행히 내가 만난 주인은 그러진 않았다. 다만 일은 고됐다....
입력:2021-06-09 14: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2) 삶이 곧 신앙인 어머니의 모범과 감화로 믿음 키워
이장식 교수 어머니 박봉금(가운데) 여사가 아들 내외 및 손주들과 함께 1965년에 찍은 가족사진. 나는 1921년 경남 진해 동쪽 해안에 위치한 덕산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조그만 마을이었다. 내가 다섯 살쯤 됐을 때 일본 군부는 우리 마을 대부분의 집을 철거시키고 거기다 비행장을 만들었다. 그런 우리 마을 옆으로 약 25리쯤 떨어진 곳에 경화동이라는 꽤 큰 동네가 있었다. 그곳엔 내가 다니던 경화교회가 있었다. 1905년에 설립된 진해에서 유일한 교회였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불신자 가정에 시집오면서 성경책과 찬송가책...
입력:2021-06-08 14:10:01
[역경의 열매] 이장식 (1) 시련과 고난의 지난 100년 세월 주께서 살게 하셨다
100세 신학자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5일 경기도 화성 ‘광명의 집’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 명예교수는 자신이 한 세기를 살았다기보다 주께서 한 세기를 살게 하셨다고 했다. 인터뷰 며칠 전 계단에서 넘어져 얼굴을 많이 다쳤지만 웃음은 잃지 않았다. 신석현 인턴기자 100년을 회고해서 몇 마디로 말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시대의 변화도 많았으니 그리 간단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시종일관 생각하는 건 하나 있다. 지금껏 살아서 예수를 믿고 신학을 끝까지 할 수 있었던 건 내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한 일이란 것이다. ...
입력:2021-06-07 14:05:03
[역경의 열매] 박종석 (20·끝) 더 늦기 전 미래세대·자신 위해 믿음의 씨 뿌려야…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심을 알게 된 뒤 교회와 가정, 일터에서 미래세대를 위해 믿음의 씨앗을 뿌리겠다고 고백했다. 사진은 박 대표가 주일예배를 드린 뒤 경기도 수원 원천안디옥교회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습. 인생 3막을 살고 있는 나에게 ‘역경의열매’ 제안이 왔을 때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에 선뜻 나서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을 나누시려 하시는 구나”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돌아보니 하나님은 ...
입력:2021-06-06 14:05:03
[역경의 열매] 박종석 (19) 인생 3막, ‘엔젤식스플러스’ 세워 창업자들 도와
6명의 전직 LG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은 긍휼의 마음으로 벤처 창업에 도움을 주기 위해 2019년 엔젤식스플러스를 설립했다. 박종석 대표도 그 중 한명이다. 왼쪽부터 유진녕 전 LG화학 사장, 박진수 전 LG화학 부회장, 신문범 전 LG전자·LG스포츠 사장, 박종석 전 LG이노텍 사장, 김종립 전 지투알 사장과 이우종 전 LG전자 사장. 강민석 선임기자 인생 3막의 옵션 중 하나가 번아웃을 통한 교회봉사였다면 ‘문제를 발견하고 해답을 찾는’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옵션이었다. 문제를 발견하고,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내 힘이 닿는 ...
입력:2021-06-03 14:05:02
[역경의 열매] 박종석 (18) 번아웃 후 성경 완독…“성경은 인간에게 보낸 러브레터”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2020년부터 경기도 수원 원천안디옥교회의 교육프로그램인 요한복음반에서 강의하고 있다. 강의 첫날엔 자신의 번아웃 경험을 간증하며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 감사로 마무리한다. 사진은 첫 강의의 슬라이드 마지막 부분. 요한복음에는 성경 말씀 중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혀진 구절 중 하나가 있다.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돋보이는 말씀이다. 나는 번아웃 후 처음...
입력:2021-06-02 14:05:03
[역경의 열매] 박종석 (17) 하나님과 나의 정체성 다시 생각하게 한 요한복음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가 지난 1월 경기도 수원 원천안디옥교회 주일예배에서 대표기도하고 있다. 지면을 빌려 짧게나마 요한복음의 매력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내가 본 요한복음은 간결하고 멋지기까지 한 말씀으로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 1:1)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다. 마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1항의 선언과도 같다. 처음 이 말씀을 대했을 때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말씀이 하나님이라니” “말씀은 하나님의 일...
입력:2021-06-01 14:05:08
[역경의 열매] 박종석 (16) ‘번아웃’으로 깨달은 하나님 사랑… 교육 봉사로 갚아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가 2019년 11월 경기도 수원 원천안디옥교회에서 장로장립 예배를 드린 뒤 가족의 축하를 받고 있다. 인생 3막에서 선택한 옵션 중 하나인 ‘번아웃’의 경험은 봉사로 연결됐다. 번아웃에서 벗어났을 당시 교회에서 하고 싶은 게 생겼다. 봉사였다. 처음 교회를 다닐 때 많은 분들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성도들은 나를 웃는 얼굴로 대해 주셨고 기도해 주셨다. 교회 뿐 만이 아니었다. 회사 등 또 다른 나의 생활 반경에도 하나님은 내 주변을 믿는 사람들로 채워주셨다. 사랑에 빚진 자였던 나는 조금이나마 ...
입력:2021-05-31 14:10:01
[역경의 열매] 박종석 (15) 잘 다니고 있는 회사 그만두라는 목사님 기도에 “아멘”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2019년 38년간 근무한 LG에서 퇴직하고 아내와 인생 3막을 설계하기 위해 한 달 일정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박 대표가 유타주에서 요한복음 8장 32절 속 ‘진리가 주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2016년 회사는 나에게 LG이노텍 대표라는 또 다른 중책을 맡겼다. LG이노텍 상황도 응급은 아니었지만 녹록지 않았다. 전자제품 속 부품을 만드는 회사라 속도감 있게 경영하던 MC사업본부와 달리 무게감 있는 경영이 필요했다.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답게 성장 기반을 다지려고 노력했다. 내가 떠나도 회사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
입력:2021-05-30 14:10:01
[역경의 열매] 박종석 (14) 예수님이 안아주신다는 느낌에 펑펑 눈물이…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2014년 번아웃으로 주저앉았을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평안을 찾았다. 왼쪽 사진은 번아웃 증상이 나타난 2014년, 오른쪽은 2016년 평안을 찾은 뒤 촬영한 모습. 영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다. 나는 이 영을 이해가 아닌 경험으로 알게 됐다. 아내는 친구에게 번아웃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내 이야기를 했다. 아내의 친구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원천안디옥교회에 가 볼 것을 권유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교회를 찾았다. 그 교회 김장환 목사가 누군지도 몰랐다. 교회 3층 복도에 걸린 사진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1973년 ...
입력:2021-05-27 14:05:03
[역경의 열매] 박종석 (13) “이제 좀 살만해졌는데 ‘번아웃’이라뇨”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2014년 LG전자 MC사업본부장 때 번아웃이 오면서 심신의 고통을 느꼈다. 이 과정에서 박 대표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피라미드 구조로 그렸다. 2014년 4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피곤하고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지만 쉴 여유가 없었다. 주요 전략 회의가 있었다. 이전에도 있었던 증상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회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지러웠다. 난생 처음 동네 병원에서 ‘링거’라는 걸 맞아봤다. 효과는 없었다. 다음날에도 아침 일찍 골프장을 찾았다. 업무상 골프 라운딩이었다. ...
입력:2021-05-26 14:10:01
[역경의 열매] 박종석 (12) 신선한 아이디어로 스마트폰 사업 궤도에 올려
박종석 엔젤식스 대표는 LG전자 MC사업본부장 시절 구성원들과 함께 만든 스마트폰 등을 ‘브레인 칠드런’이라 부른다. 박 대표의 집에는 그때 만든 옵티머스뷰, 옵티머스G, G2, G3 등 브레인 칠드런이 아직도 있다. 생각의 맷집과 함께 아이디어에 근육을 키우는 것도 필요했다. 구성원들에게 ‘왜’를 반복하게 했다. 어떤 문제건 해결책은 있지만 해결 방안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왜’를 반복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야 한다. 카메라 성능 개선에 관한 예화를 소개한다. LG전자의 초기 스마트폰은 카메라 성능에 대한 시장 평가가 ...
입력:2021-05-25 14: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