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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의식 (16) 심방 다녀오면 집 앞에 쌀과 고기… 성도들 사랑에 눈물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201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영등포노회에서 김학만 원로목사를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하고 있다. 화곡동교회 전임 목사님이신 김학만 목사님은 은퇴 후 김포로 가셔서 말씀교회를 개척하셨는데 말씀교회는 독립 교단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평생을 우리 화곡동교회와 영등포노회, 총회를 위해 헌신한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 독립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 목사 면직 사유가 됐다. 김 목사님이 그렇게 수모를 겪으시는데도 나는 도와드릴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인내하며 회복의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종이 2008...
입력:2022-01-27 14:10: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15) “의술로는 치료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김의식(앞줄 왼쪽 여섯 번째) 목사가 인천 강화군 계명수련원에서 치유동산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치유동산은 성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교회 프로그램이다. 심근경색의 위기에서 주님의 은혜로 살아난 후, 계속되는 영적 전쟁에서 받는 온갖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주님께서 부족한 종에게 지혜를 주셨다. 새벽기도를 할 때마다 가장 먼저는 통회와 자복부터 하게 하셨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을 가장 먼저 주의 종인 나 자신에게서 찾게 하셨다. 그다음으로는 교회의 갖가지 문제를 안고 해결을 위한 기도제목...
입력:2022-01-26 14:05: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14) 심근경색으로 죽음 직전까지… 치유의 은혜 체험
화곡동교회는 10여년에 걸친 분쟁을 그치고 부흥을 거듭한 끝에 2012년 새 예배당을 짓고 입당했다. 이름도 현재의 치유하는교회로 바꿨다. 글로리아채플에서 성도들이 예배하는 모습. 화곡동교회의 분쟁은 갈수록 더욱 심해지며 끝이 보이질 않았다. 교회뿐만 아니라 노회 수습전권위원회와 관계도 점점 악화했다. 수습전권위원회 부위원장 목사님이 수습을 전제로 각서를 쓰라고 해서 쓰면, 위원장 목사님이 반대하셨는지 그 후에는 각서 내용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셨다. 억울하고 원통한 일은 끝이 없었다. 그중에 가장 눈물 나는 일은 수습전권위원회가 불러서 ...
입력:2022-01-25 14:05: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13) 욕설과 몸 싸움장 된 교회… 주일에 설교 가기도 두려워
김의식(앞줄 왼쪽 다섯 번째) 목사가 2000년 서울 화곡동교회 목사 위임예배에서 당회원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00년 6월 11일 서울 화곡동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부임하기 전부터 한 안수집사님이 화곡동교회에 오면 다치니까 오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10여 차례씩 보내왔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의식(義植)이라는 이름 그대로 누가 불의하게 압력을 가하면 더욱 드세게 일어서는 의식(意識)이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시끄럽기에 이렇게 오지 말라고 압력을 가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부임했다. 교회에 막상 와서 보니 장난이 아...
입력:2022-01-24 14:05:03
[역경의 열매] 김의식 (12) 담임목사 청빙에 고민하자 “아빠, 목사는 고생을 해야…”
김의식(왼쪽) 목사가 딸 안나(가운데)의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모습. 1998년 1월 호남신학대에 부임했다. 내려갈 때는 유배지로 떠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고향이 좋았다. 강의 전에는 항상 찬양과 통성기도를 했다. 미국 신학대학원에 ‘Seminary is a cemetery’(신학교는 무덤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도 신학대학원에 입학할 때는 뜨겁던 신학생들의 신앙이 졸업할 때가 되면 재로 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의 영성에 불을 지피기 위해 강의 10분 전부터 찬양과 통성기도를 하면서 성령님의 불을 붙이는 ...
입력:2022-01-23 14:10: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11) “배경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신학대 교수도 못되나”
김의식(앞줄 왼쪽 여덟 번째) 목사가 지난해 서울 강서구 치유하는교회에서 열린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총장 취임예배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97년 5월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교인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귀국했다. 그런데 뜻밖의 시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교수 임용 1순위로 이사회에 올라갔는데 유력 이사의 조카였던 2순위 후보와 순위가 뒤바뀌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배경 없고 돈 없는 사람은 신학대 교수도 못 되는가?’ 하고 또 한 번의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런데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그 교수의 손위 동서가 내가 한양대를 다...
입력:2022-01-20 14: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10) 암 치유 기적… 힘들게 하던 교인들에 경종 울려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1996년 미국 시카고신학대학원 학위수여식에서 문채성 사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시카고한인연합교회 목회 시절 기억에 남는 성도는 김진해 안수집사님과 김계자 집사님(현 권사님) 부부다. 남편 집사님은 내가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교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다가 6개월을 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방암이 재발해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남편 집사님이 방황하던 6개월이 뇌리를 스쳤다. 부인 집사님을 위해 매일같이 기도하던 중 고난주일을 맞이했다. 집사님...
입력:2022-01-19 14: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9) 첫 목회지 성령께 묻자 “가라”… 눈물의 이민 목회 시작
김의식(원 안) 목사가 1992년 미국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위임예배에서 성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에게 이민 목회는 눈물의 시간이었지만 잊지 못할 첫 사랑을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1989년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1년 동안 열심히 일하며 공부한 결과 보스턴대학교(Th.D.), 에모리대학교(S.T.D.), 드류대학교(Ph.D.),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Ph.D.), 시카고신학대학원(Ph.D.)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다른 대학들은 다 목회상담이 전공이지만 시카고신학대학원은 가족치료 전공이었다. 당시 시카고신학대학원은 종합대...
입력:2022-01-18 14:05:03
[역경의 열매] 김의식 (8) “쉴 틈 없이 충성 다했는데 왜 딸을 데려가시나요”
김의식(왼쪽) 목사가 1986년 서울 노량진교회 전도사 시절 문채성 사모, 큰 딸 한나와 함께 휴가를 떠난 모습. 노량진교회에서의 목회가 전부 다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일생에 가장 후회되고 가슴 아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내는 내가 심방 전도사이던 시절 나의 유학을 위해 북아현동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같은 동네 3층 옥탑방이었다. 당시 내가 맡은 5교구에는 경기도 외곽에 사는 교인들이 많았다. 새벽 일찍 교회에 가서 승합차를 몰고 심방을 다니다가 저녁 늦게 교회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10시 안팎이었다. 19...
입력:2022-01-17 14:10:01
[역경의 열매] 김의식 (7) 림인식 목사의 신앙과 삶 보며 치유 목회의 틀 다져
김의식(왼쪽) 목사가 2008년 림인식 노량진교회 원로목사와 함께한 모습. 김 목사는 1984년 노량진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할 때부터 림 목사를 영적인 아버지로 섬겼다. 1983년 10월 군대 전역 후 봉사할 교회를 찾아 기도를 시작했다. 누나의 시아버지인 김두현 광주 서석교회 장로님이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회계였고 총회장은 림인식 목사님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통해 김 장로님께 림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시는 노량진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당시 림 목사님은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셨는...
입력:2022-01-16 14:05:03
[역경의 열매] 김의식 (6) 괴롭히던 선임이 싸놓은 더블백엔 ‘폐의류만 가득’
김의식 목사가 1983년 수도경비사령부에서 군종 사병 생활을 하던 모습. 김 목사는 군 생활이 영성은 물론 체력과 정신력을 연단하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1981년 7월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그 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청와대 경호부대)으로 배치를 받았다. 내가 30경비단에 가게 된 데는 잊을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야간 신학교를 졸업한 후 혜성교회 전도사로 있으면서 금요철야 기도회를 인도할 때였다. 칠순이 넘고 몸도 불편하신 김순례 권사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실 때마다 “우리 전도사님, 서울 시내 한복판에 배치돼 ...
입력:2022-01-13 14:05: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5) 결혼 후 독립선언… 신혼여행 다녀오니 13만원이 전부
김의식(왼쪽) 목사와 문채성 사모가 1981년 광주제일교회에서 결혼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 목사와 문 사모는 가난한 신혼생활 중에도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성서침례신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포스터 선교사님께서는 군대를 마치고 미국에서 석·박사학위 과정을 전액 장학생으로 다니도록 해줄 테니 유학 준비를 하라고 권면하셨다. 장로교회 출신이었던 나로서는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남노회장까지 역임하셨던 아버지는 “어떻게 부자간에 장로교와 침례교로 나뉠 수 있겠냐. 네가 그렇게 좋다 하는 복음을 장로교회에 와서 전하면 ...
입력:2022-01-12 14:10:02
[역경의 열매] 김의식 (4) “주님, 저 좀 살려주세요” 간절한 기도에 성령 임재
김의식(화살표) 목사가 1978년 서울 성서침례신학교(현 성서침례대학원대) 입학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는 한양대 재학 시절 성령을 통한 병 고침을 받고 야간에 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숭일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77년 한양대 공대에 입학했다. 슈바이처 선교사의 삶에 감명을 받아 재수하며 의대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춤을 배우고 술을 마셨다. 그해 11월 종강 파티를 마치던 날 밤 서울 마포구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다. 처음에는 몸살감기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2주 동안 약국에서 ...
입력:2022-01-11 14:05:03
[역경의 열매] 김의식 (3) 금고 손대려다 아버지께 들켜 “커서 뭐가 되려고…”
김의식(뒷줄 오른쪽 두 번째) 목사의 아버지가 1998년 전남 나주 영산포중앙교회에서 원로장로로 추대될 당시 찍은 가족사진. 내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로움 속에 살고 있을 때 나를 붙잡아 주신 분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고 방구석에서 혼자 울고 있을 때마다 다가와 “의식아, 엄마가 네가 미워서 그랬겠냐? 다 너 잘되라고 하신 거야!”하면서 위로해 주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당시 나를 붙들어 주는 가장 큰 힘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겨 드리는 일이 터졌다. 아버지가 약방에서 ...
입력:2022-01-10 14: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2) “의식인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어머니의 폭탄선언
김의식(오른쪽) 목사가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 두 여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김 목사는 어릴적 큰 약방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덕에 윤택한 가정 환경에서 살았으나 학교와 교회에서 문제아였다. 부모님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셨다. 내 위로 누나와 형, 그리고 아래로 두 여동생이 있다. 모두 부모님의 신앙을 이어받아 교회를 섬기며 각각 의사 약사 한의사 간호사 그리고 목사 가정을 이뤄 복되게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셋째인 나에게 있었다. 부모님은 약방이나 교회 일로 늘 바쁘셔서 여러 자녀에게 깊은 사랑을 쏟아 주기 힘들었다. 더욱이 나는 남매 중 한가운데...
입력:2022-01-09 14:05:04
[역경의 열매] 김의식 (1) 치유 목회 원동력은 ‘지역 의식 뛰어넘은 십자가 사랑’
김의식 치유하는교회 목사가 지난달 8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일보빌딩에서 자신의 삶을 바꾼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내 고향은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262번지다. 1958년 4월 20일 나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영산포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호남 출신이어서 받은 혜택보다는 상처가 훨씬 크고 많았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대학을 갈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경험한 지역 차별은 생각보다 심했다. 졸업 후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갈 때도 그랬고 이후 목회를 시작할 때도 ...
입력:2022-01-06 14:10:01
[역경의 열매] 김종생 (15·끝)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작은 위로자’ 됐으면…
베트남 출신 여성 윤민주씨의 고향 지인들이 2019년 1월 21일 베트남 현지에서 열린 ‘암소은행 2차 전달식’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15년 12월 벌어진 일이다. 당시 서른한 살이던, 베트남 출신 여성 윤민주씨가 남편한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곱 살이던 딸도 목숨을 잃었다. 윤씨에게 남편은 편집증 증세를 보였고, 2014년 살해 시도를 했었는데 당시 법원은 접근 금지명령을 내렸지만 허사였다. 남편은 모녀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윤씨의 한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부부갈등과 고부갈등, 가정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입력:2022-01-05 14:05:03
[역경의 열매] 김종생 (14) 위안부 피해 할머니 쉼터 마련… “모두 하나님 은혜”
김종생(오른쪽) 목사가 2012년 10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을 기념하는 입주 감사예배에서 발언하고 있다. 2019년 1월 28일 별세한 김복동 할머니는 열네 살 때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집을 나섰다가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평일에는 15명쯤, 토·일요일에는 셀 수가 없다. 너무 많아서. 한 50명쯤 됐을 거라. 씻을 시간도 없이 짐승만도 못한 삶을 견뎌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돌아온 것은 가족들의 외면이었다. “내가 나를 찾으려고 하니까 큰언니가 말렸어. 조카들 생각...
입력:2022-01-04 14:05:03
[역경의 열매] 김종생 (13) 지구촌 아픔의 현장 함께한 한국교회… 구호·재건 총력
김종생(왼쪽 다섯 번째) 목사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 현지인들과 대책회의를 열고 있다. 중남미 카리브해에 있는 아이티는 한국인에겐 생소한 나라다. 아이들이 진흙 쿠키로 허기를 달랜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로 가난한 국가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2010년 1월 12일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이 일어났다. 지진을 겪어본 나라도 아니고 경제적 기반까지 열악하며, 내진 설계가 제대로 된 건물이 없는 곳이기에 피해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통신 회선이 다 끊겼고 육로로 피해 지역에 접근하기 힘든 곳도 많았다. 구호를 위해 아이티를 찾는 비행기의 행렬...
입력:2022-01-03 14:05:02
[역경의 열매] 김종생 (12) 한국교회봉사단,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 상처 보살펴
김종생(가운데) 목사가 2009년 서울 논현동에서 벌어진 고시원 살인 사건과 관련해 유족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은 서해안에서 기름띠 제거 방제작업 자원봉사와 함께 지역 주민을 위로하기 위해 쌀과 생필품 지원사업, 무료진료사업, 조손가정 어린이 돌봄 사업도 벌였다. 2008년 5월에는 만리포해수욕장에서 자원봉사자 1만여명과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민 위로와 소망의 날’을 개최했다.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태안 지역에서 생태여름수련회를 가지도록 홍보하고 독려하기도 했다. 기독교 연합단체인 기독교환경운...
입력:2022-01-02 14:05:02
[역경의 열매] 김종생 (11)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현장서 한국교회 하나로 뭉쳐
한국교회 성도들이 2007년 12월 서해안 기름유출 현장에서 기름띠 제거 작업을 벌이고 있다. 2007년 12월 7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유조선과 예인선이 충돌해 원유가 유출되는 사고가 났다. 유조선 탱크에 있던 1만2547㎘(7만8918배럴)의 원유가 태안 인근 해역에 유출돼 태안군과 서산시 양식장, 어장 등 8,000여㏊가 원유에 오염됐다. 온갖 어패류가 폐사했고 짙은 기름띠는 만리포 천리포 모항 천수만 안면도는 물론 전라도까지 퍼졌다. 그야말로 엄청난 재난이었다.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로서 현장에 달려가야 했다. 우리는 만리...
입력:2021-12-30 14:10:01
[역경의 열매] 김종생 (10) 사랑의 연탄 나누기 운동… ‘마을 목회’로 발전
김종생 목사는 ‘목회자 유가족협의회’가 만들어지는 데 일조한 일에 대해 큰 보람을 가지고 있다. 사진은 2007년 8월 30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었던 ‘목회자 유가족 실태조사 연구발표회’. 우리 교단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영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처럼 ‘브랜드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고민 끝에 ‘사랑의 연탄 나누기’ 사업을 시작했다(총회는 지금도 이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게 해준 분이 연탄은행 설립자인 허기복 목사다. 나...
입력:2021-12-29 14:05:03
[역경의 열매] 김종생 (9) 예장통합 사회봉사부 총무로 선출… 소외된 현장 찾아
김종생(오른쪽) 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 총무로 재직하던 시기, 인천에서 ‘북한 콩기름 75t 지원 감사예배’에 참석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대전에서 월평종합사회복지관과 정림종합사회복지관, 대덕자활지원센터, 유성구노인복지관 등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이들 기관에 몸담으면서 늘 자문한 것은 ‘일반 사회복지’와 ‘기독교 사회복지’의 차이점이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기에 복지 기관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 탓에 10여년간 여러 기...
입력:2021-12-28 14:05:03
[역경의 열매] 김종생 (8) 사회 복지 사역 현실은 ‘막노동’… 일 잘하고 욕먹기도
김종생(가운뎃줄 왼쪽 두 번째) 목사가 월평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할 당시 직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공부방 사역을 하면서 이웃을 돌보는, 좀 더 ‘종합적인’ 일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 즈음 접한 소식이 달동네 빈민에게 주택을 제공하는 영구임대주택사업이 대전에서도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장소는 대전의 월평동이었다. 주택 단지에는 빈민들을 돌보는 사회복지관이 2곳 들어서는데, 이곳들을 민간에 위탁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우여곡절을 겪은 뒤 ‘대전노회유지재단’이라는 종교법인이 월평종합...
입력:2021-12-27 14:05:04
[역경의 열매] 김종생 (7) 달동네 공부방 열고 공부는 물론 무료 진료·급식 제공
김종생(왼쪽 네 번째) 목사가 대전에서 공부방 사역을 하던 시절 동료들과 찍은 단체 사진. 신학교 재학 중이던 시절, 나는 대전 낭월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일했다. 이곳에서 나는 사회 선교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사회봉사부에서 총무를 역임하신 고(故) 박창빈 목사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나는 사회 선교에 대한 훈련도 받기 시작했다. ‘도시사회선교권 강화훈련’의 수강생이 됐다. 나는 ‘대전지역사회선교협의회’에서 실무를 담당했다. 협의회는 노회의 전문성이 부족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2~3개 노회...
입력:2021-12-26 14:05:03